영생원

원어 항목명 永生院
한자 永生院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지명/시설
지역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모지구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준공 시기/일시 1973년 10월 5일
최초 설립지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모지구
현 소재지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모지구
원어 항목명 永生院
원어 주소 日本国北九州市門司区
성격 납골당
정의

1973년 일본 기타큐슈시 모지구에 설립된 재일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의 납골당.

개설

영생원은 지쿠호[筑豊] 탄광 지역의 각처에 방치되어 있던 재일 조선인 탄광 희생자 및 강제 연행에 의하여 일본으로 끌려와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1973년 기타큐슈시[北九州市] 모지구[門司區]의 공동묘지에 설치되었다. 영생원의 설립은 일제의 강제 동원 문제와 재일 조선인의 인권 운동에 헌신해 온 재일 대한 기독교회 고쿠라교회[小倉敎會]의 최창화 목사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설립 초기 다가와, 이이즈카 등의 절에서 157기의 유골을 옮겨 왔다. 최창화 목사는 한 절간에서 과일 상자 같은 허름한 곳에 아무렇게나 조선인 강제 연행 희생자들의 유골이 방치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흩어진 유골을 모아 영생원에 안치하였던 것이다. 안치된 유골은 유족이 판명되는 대로 유족에게 인도하고 있다.

건립 경위

1960년 고쿠라교회에 부임한 최창화 목사는 지쿠호 탄광 지역에서 탄광 사고로 숨진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납골당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1968년 탄광 희생자의 자녀인 최호경, 김준수 등과 함께 ‘납골당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신자들로부터 기금을 모집하고, 지쿠호 지역의 탄광 사무소와 절을 찾아 유골의 실태를 조사하였다. 1973년 모지구의 외딴 산속의 공동묘지 내에 대지 198.34㎡[60평]에 건평 66.11㎡ [20평]의 납골당을 건립하고, 1973년 10월 5일 교포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당초 계획은 이날 추도식도 겸하려 했으나, 여러 절들이 “남북이 통일될 때 통일된 정부 밑에서 유가족에게 인도하겠다.” 등의 이유를 내걸고 유골 인도를 거부하여 당일에 추도식은 치르지 못하였다.

변천

일제 말 일본 기타큐슈 지역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1973년 10월 5일 건립되었다.

현황

2017년 현재는 강제 동원 희생자뿐만 아니라 최창화 목사 부부를 비롯한 재일 한인의 유골도 안치하고 있다. 2008년 당시 고쿠라교회 목사였던 주문홍은 ‘영생원은 전후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역사적 장소와 동시에 참혹한 일제 강제 연행의 역사적 사실을 고발하는 산 교과서’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小田山墓地·朝鮮人遭難の碑』(小田山墓地追悼集會 パンフレット作成委員會, 2014. 9)
  • 『동아일보』(1973. 10. 25)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