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大須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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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須事件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
시대 | 현대/현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2년 7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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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구 오스 |
원어 항목명 | 大須事件 |
1952년 7월 7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구 오스에서 발생한 공안 사건.
1952년 7월 6일 일요일, 중화인민공화국의 북경[北京]에서 일중 무역 협정(日中貿易協定) 조인식을 하고 일본 사회당(日本社会党)의 오아시 케이[帆足計]와 개진당(改進党)의 미야코시 키스케[宮越喜助]가 귀국하여 나고야역[名古屋駅]에 도착하였다. 오아시 케이와 미야코시 키스케를 환영하기 위해서 1천 명의 군중이 역 앞에 모였다가 데모를 하였고 나고야시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해산 과정에서 12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소지하고 있던 문서에서 1952년 7월 7일 환영 집회에 화염병을 다수 들여와 미군 시설과 경찰서를 습격하려는 계획이 발각되었다.
1952년 7월 7일 월요일 당일, 나고야시[名古屋] 경찰은 경비 태세를 강화하고 전 경찰관을 대기시켰다. 1952년 7월 7일 오후 2시경부터 회장인 오스구장[大須球場][현 나고야 스포츠 센터]에 일본 공산당원과 재일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군중이 모이기 시작하여 오후 6시 40분경 환영 집회가 거행되었다. 오후 9시 50분 집회가 끝나자 나고야대학 학생의 연설이 시작되었고, 선동에 따라 약 1천 명이 불법 데모를 시작하였다. 경찰 방송차가 해산하도록 경고했지만 데모대는 화염병을 던져 방송차를 불태웠다. 경찰은 폭도를 진압하기 위해 현장에 직행하였지만 데모대는 사방으로 분산하여 화염병 공격을 하였고 일대가 대혼란에 빠졌다. 또한 데모대와는 별도로 미군 주차장에 세운 승용차를 불태우거나 나카세무서에 화염병을 던지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화염병 사건으로 경찰관 70명, 소방사 2명, 일반인 4명이 부상을 당하였고, 데모대 측은 한 명이 사망을 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나고야시 경찰은 269명을 검거하였는데, 검거한 사람 중 반수 이상이 재일 조선인이었다. 조사 결과, 오스 사건은 공산당 나고야 시위원회가 계획하고 조선인 조직인 조국방위대와 연계하여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나고야 지방 검찰청은 소요죄(騒擾罪) 등을 적용하여 152명을 기소하였고, 1978년 9월 4일 최고 재판소 제2소법정은 상고를 각하하고 유죄를 확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