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구원운동

원어 항목명 金大中救援運動
한자 金大中救援運動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4년
종결 시기/일시 1983년 4월
원어 항목명 金大中救援運動
성격 시민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대중
정의

김대중의 1973년 납치 사건과 1980년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일본의 지식인과 시민 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된 구명 운동.

역사적 배경

1972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한 이후 김대중(金大中)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박정희의 독재를 반대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 본부를 결성하기 직전인 1973년 8월 8일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괴한에게 납치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은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옮겨지던 배 안에서 살해당할 뻔한 상황을 겪었지만 구조되어 1973년 8월 13일 한국의 동교동 자택에서 석방되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당시 독재 체제를 강화하려던 박정희의 정적 제거 일환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회원들 및 양심적인 일본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초기부터 다양한 채널을 통해 김대중 구명 운동을 벌였다.

경과

일본 영토에서 발생한 사건이므로 주권 침해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김종필의 일본 방문 이후,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려던 일본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으로 변하였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양국 사이의 정치적 결착으로 인해 진상 규명이 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인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위원장을 맡은 중의원 결산 위원회에서 문제를 제기하였고, 김대중을 도우려는 일본인들은 직접적으로 한국 정부에 김대중 방일에 관한 성명서를 전달하였다. 이듬해인 1974년에는 ‘일본 정부의 대한(對韓) 정책을 바로잡고 한국 민주화 투쟁과 연대하는 일본 연락회의’[연대회의]를 결성해 김대중 사건의 진상 규명과 원상 회복,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대중은 1976년 다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투옥이 되었고, 1980년에는 전두환에 의해 조작된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과

일본에서는 ‘일본 정부의 대한(對韓) 정책을 바로잡고 한국 민주화 투쟁과 연대하는 일본 연락회의’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여야당 정치인, 종교계, 노동계, 학계 인사들이 참여하여 ‘김대중씨를 죽이지 마! 시민 총궐기 대회’가 열렸다. 재일 코리안 내부에서도 김대중 구원운동이 벌어졌지만 새로운 정권 수립과 함께 박정희 집권기와는 다른 복잡성을 반영하였다. 구원 운동은 김대중이 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할 때까지 운동을 지속하였고 1983년 4월 해산하였다.

참고문헌
  • 정경모,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사, 2010)
  • 와다 하루키, 「와다 하루키 회고록」(『한겨레 신문』, 2006~2007)
  • 『激動するアジアと朝鮮 日韓民衆の連帯を求めて』(世界政治経済研究所, 1976)
  • 和田春樹, 『日韓連帯の思想と行動』(現代評論社, 1977)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