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朝鮮奨学会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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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奬學會事件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9년~19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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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朝鮮奨学会事件 |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조선 장학회를 둘러싸고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의 두 차례 전개되었던 사건.
조선 장학회는 일제 강점 이후 1911년 10월에 설치한 조선 총독부 학무국의 학생 감독부에 연원을 두고 있다. 1941년 1월에 조선 장학회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해방 직후 재일본조선인연합회의 영향을 받았다. 재일본조선인연합회는 이사진을 개편하고 정관을 개정하여 조선 장학회를 재일조선학생동맹의 기관으로 개편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계 학생을 제외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와 더불어 재일본조선인연합회가 조선 장학회 재단의 일부 자산을 팔아 활동자금으로 사용함에 따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한국 정부가 항의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1949년과 1956년~1957년 두 차례에 걸쳐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1차 투쟁은 1949년 5월에 전개되었다. 5월 8일 재일본조선학생동맹 간토 지부 제5회 정기 총회에서 장학생 선발 문제로 좌우로 분열되자 재일본조선인연합회계 학생들이 조선 장학회를 점거하였다. 이에 5월 23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계 학생들이 실력으로 조선 장학회에 입거하여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이를 계기로 재일본조선학생동맹은 재일한국학생동맹[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계]과 재일본조선학생동맹[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으로 분열되었다. 제2차 투쟁은 장학회 운영 문제로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대립되었다. 일본 정부와 3차 회의를 통해 조선 장학회를 민족공유의 재단으로 운영하기로 합의를 하였으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은 독점적으로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은 주일 대표부의 협력을 받아 일본 정부에 항의하였다.
이후 조선 장학회의 운영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일본 문부성에서 파견한 각 3명으로 이사진을 구성하여 균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