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공휘 사건

원어 항목명 文公輝事件
한자 文公輝事件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90년 6월 14일
전개 시기/일시 1990년 6월 19일
발생|시작 장소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오사카시청
원어 항목명 文公輝事件
관련 인물/단체 문공휘(文公輝)
정의

1990년 6월 재일 한인 3세 문공휘가 국적 차별로 인해 공무원 채용 시험 접수를 거부당한 사건.

개설

1990년 6월 14일에 오사카 시립 대학[大阪市立大學] 재학 중이던 재일 한인 3세 문공휘(文公輝)가 오사카시[大阪市]의 1991년도 사무직 직원 채용 시험에 서류를 제출했으나 시 인사 위원회에서는 일본 국적이 없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하였다. 이에 1991년 6월 19일 문공휘는 “거부 조치는 법적 근거가 없고 헌법상의 평등 원칙에도 위배된다.”라고 하면서 오사카 지방 재판소에 제소(提訴)하였다.

오사카시의 원서 접수 거부 처분을 취소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문공휘는 “일본 국적이 없으면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규정은 지방 공무원법에도 없으며, 국적 차별은 헌법 14조[법 앞의 평등]에도 위배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역사적 배경

재일 한인에 대한 공무원 채용의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75년에 재일 한인 고등학생 2명이 당시 덴덴 공사[電電公社][현 NTT]에 입사하려 했으나 덴덴 공사는 한인 고등학생 두 명을 ‘외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채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5년이란 시기는, 이미 재일 한인 2세 박종석(朴鐘碩)이 1970년 12월 히타치 제작소[日立製作所]를 상대로 제소하여 1974년 6월에 최종적으로 승소(勝訴)한 이후였다. 또한 이러한 차별에 대해 대한재일 그리스도교회와 부락해방동맹(部落解放同盟) 등 14개 단체가 여러 차례 항의 집회를 개최하여 덴덴 공사의 채용과 관련한 국적 조항 철폐 운동을 전개하였다. 덴덴 공사 측은 외국 국적자를 채용하지 않는 것이 공사의 방침이라며, 채용을 완강히 거부했으나, 두 고등학생의 모교 교사들까지 나서는 등 운동은 점차 확산되었고 비판의 목소리도 고조되었다. 1977년에는 국회 예산 위원회에서 사회당 의원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처음으로 재일 한인의 공무원 취업 문제가 일본 국회에서도 논의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성과로 1977년 9월에 덴덴 공사는 수험 자격에서 국적 조항을 철폐한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외국인의 응시가 허용되었다.

경과

원서 접수가 거부된 다음날부터 문공휘는 오사카 시청 앞에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한인으로서 이곳 오사카시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오사카시의 공무원이 되고 싶다’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문공휘의 투쟁은 오사카 민투련의 지원을 받았으며, 민족차별과 투쟁하는 연락협의회[민투련]의 요청을 받은 전일본자치단체 노동조합과 부락해방동맹 등이 참여하여 지원 세력이 점점 증가하였고 많은 지지자들이 오사카 시청 앞에 진을 치게 되었다. 문공휘의 투쟁은 매스컴의 관심을 끌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도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오사카시는 3년이나 계속 문공휘의 원서 접수를 거부했으나 문공휘는 끈질기게 투쟁을 계속하였다.

결과

오사카시는 결국 외국인이 응시할 수 있도록 국적 조항이 없는 ‘국제’와 ‘경영 정보’라는 전문직을 새로 만들었다.

의의와 평가

전문직이 신설되었을 뿐 일반직이 개방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정령 지정 도시에서 공무원 채용의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문공휘의 투쟁은 매우 큰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 『일본 한인의 역사』상(국사편찬위원회, 2009)
  • 『동아일보』(1990. 6. 20)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