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테이프 사건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1년
관련 인물/단체 김재권
정의

1971년 김재권 공사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간부간에 반국가적인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있다고 발언한 사건.

역사적 배경

5·16 군사 정변 이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권일을 단장으로 하는 세력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산하 단체인 재일본한국청년단과 한국청년학생동맹은 이에 반대하였으며, 이 중 이희원, 배동호 등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정상화 유지 간담회를 조직하였다. 권일을 비롯한 집행부와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 간의 대립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양 세력의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3년 권일이 낙선하고 새 단장으로 김금석이 선출되었다. 이 시기,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구성원들은 한일 회담에 주목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법적 지위 등이 교섭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는 다시 권일이 단장이 되었고,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한국 정부와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65년 7월에는 권일 집행부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았던 원심창 등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자주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한일 조약 체결 후 협정 영주권을 둘러싸고 한국 정부의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는 1969년 8월에 개최된 ‘재일거류민단 강화 대책 회의’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한국 정부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집행부 사이의 온화한 기류는 박정희 정권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집행부[당시 단장은 이희원]에 비판적인 세력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내 대표적인 박정희 정권 비판 세력이었던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유지 간담회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중앙 세력을 장악하기 위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1971년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단장 선거에 후보 유석준을 내세웠다.

경과

1971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중앙 위원회에서 축사를 담당한 김재권 공사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간부를 역임한 인사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와 만나 반국가적 대화를 했다고 발언하고, 증거로 녹음 테이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거 후 공개하겠다고 했던 테이프는 공개되지 않았다.

결과

김재권 공사의 발언 후, 유석준은 단장 선거에 낙선하고 이희원이 재선되었다. 그 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정상화 유지 간담회를 중심으로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자주 수호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정상화 유지 간담회는 주일 공관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고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중앙을 불신임한다는 내용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중앙과 반대 세력간의 충돌은 계속 이어졌으며, 1972년 7월 한국청년학생동맹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산하 단체에서 배제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의의와 평가

녹음 테이프 사건을 계기로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내부의 혼란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박정희 정권과 중앙 정보부의 재일 한인 사회에 대한 개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참고문헌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김태기, 「한국정부와 민단의 협력과 갈등관계」(『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3-1, 전남대학교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소, 2000)
  • 「독재정권 하수인 노릇」(『시사저널』, 2006. 6. 30)
  • 「유리창의 테이프 자국이 뜻하는 것은?」(『프레시안』, 2007.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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