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金芝河救命運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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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芝河救命運動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70년대-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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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金芝河救命運動 |
관련 인물/단체 | 김지하 |
1970~80년대 일본에서 시인 김지하의 석방, 자유 회복, 자유로운 활동 등에 대한 보장을 요구한 운동.
1970년 한국의 시인 김지하는 『사상계』 5월호에 시 「오적(五賊)」을 발표하였다. 시 발표로 인해 김지하는 일시 구속에 처해졌으며, 『사상계』는 정간 조치되었다. ‘오적필화사건’은 일본에도 전해져, 신문 등을 통해 보도되었다.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년 뒤 인민혁명당사건 관련 저작인 「고행1974」를 발표하여 1974년 3월 다시 한 번 체포되었다.
1970년 시 「오적」의 발표로 일시 구속에 처한 김지하는 1972년에 시 「비어(蜚語)」를 발표하였다. 1970년 5월 오다 마코토[小田実]와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雄] 등이 ‘김지하 구원 위원회[キム·ジハ救援委員会]’를 결성하여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김지하의 석방과 활동의 자유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였다. 김지하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해 1974년 7월 9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1974년 7월 13일에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그 후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1974년 7월 10일 오다 마코토[小田実]를 중심으로 결성된 ‘김지하를 돕는 모임[金芝河らをたすける会]’ 등이 김지하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철회할 것, 김지하를 석방할 것 등을 주장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1974년 7월 19일 도쿄뿐만 아니라 후쿠오카, 고베 등을 포함한 일본 각지에서 ‘김지하를 돕는 모임’ 및 여러 단체들에 의해 ‘한국 군사재판 피고 석방 요구 세계 동시 행동’이 이루어졌다.
1975년 2월 석방된 김지하는 1975년 2월 25일부터 1975년 2월 27일까지 『동아일보』에 ‘인민혁명당 사건’ 을 다룬 「고행 1974」를 연재하여 1975년 3월에 다시 연행되었다. 김지하의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김지하를 돕는 모임’, ‘가톨릭 정의와 평화 일본 위원회[カトリック正義と平和日本委員会]’ 등이 1975년 5월 16일 도쿄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김지하 구원운동 재개에 관한 뜻을 밝혔다. 그 후로도 김지하 구원운동은 다양한 집단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되었다.
일본 각지에서 김지하 구원운동은 계속되었으며, 김지하는 1980년 12월 석방되었다.
일본 시민사회가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진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