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제 사건

원어 항목명 韓宇済事件
한자 韓宇濟事件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일본 가나가와현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1년 9월 16일
종결 시기/일시 1955년 7월 31일
발생|시작 장소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원어 항목명 韓宇済事件
정의

1951년 9월 19일 요코하마 조선인 소학교 건축 기성 위원장 한우제가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9년 11월 4일의 조선 학교 강제 폐쇄 이후 민족 교육을 옹호하고 함께 투쟁해 온 많은 재일 한인들의 관심사는 민족 교육의 장을 확보하고 다시 민족 교육의 실시하는 것이었다. 재일 한인들의 이와 같은 민족 교육에 대한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중 1951년 9월 16일 아침 전 재일본조선인연맹 가나가와현 위원장으로 요코하마 조선인 소학교 건축 기성 위원회 위원장이며, 요코하마 조선인 소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한 한우제가 일본인 가야마 후쿠지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우제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의 『가나가와신문』 9월 17일자 기사에 「한우제씨 사살되다」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질 만큼 크게 보도되었다.

경과

한우제를 살해한 범인 가야마 후쿠지는 가가쵸 경찰서에 검거된 후 ‘상해 치사죄’로 기소되어 1952년 10월에 열린 1심 재판에 불복하여 고등 법원에 항고하였다. 하지만 항고를 고등 법원이 기각하자 다시 대법원에까지 상고하였다. 그 후 1955년 7월 31일에 대법원의 기각 결정으로 최종 1심 판결이 확정되었다.

결과

한우제 사건과 유사한 사건은 오사카의 이즈미오쓰 조선 소학교에서도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재일 한인들의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과 교육의 장 확보에 대한 더욱 강한 투쟁 의식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우제의 장례는 가나가와[神奈川] 지역의 재일 한인들이 대거 참가한 ‘인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요코하마[横浜] 소학교 교정에서 진행되었으며, 학교에서 화장장이 있는 노게야마[野毛山]까지 약 6㎞에 걸쳐 조선인 조문객들이 운집하였다. 장례식이 끝난 직후 가나가와 지역의 재일 한인들은 요코하마 소학교의 정문 현관 옆에 비석을 세우고 한우제 업적을 기리며 비운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비석에는 ‘조선 해방 투사 고한우제 선생의 비’라는 글귀와 함께 한우제의 생전의 활동 내역을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 金徳龍, 『朝鮮学校の戦後史: 1945-1972』(社会評論社,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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