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이타 사건

원어 항목명 吹田事件
한자 吹田事件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2년 6월 24일
종결 시기/일시 1963년 6월 22일
발생|시작 장소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원어 항목명 吹田事件
관련 인물/단체 전차 부대|야마고에 부대
정의

1952년 6월 24일 일본 오사카 스이타시 일대에서 학생, 노동자, 재일 조선인이 한국 전쟁에 협력하는 것을 반대해 일으킨 소요 사건.

역사적 배경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미군의 병참 기지로서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간접적으로 한국 전쟁에 관여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은 비행장의 이용은 물론 병사들의 훈련 등에 관해서도 일본에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의 당시 수상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협조 요청을 수락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 조선인들이 일본 각지에서 반미 반전 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당시에 무장 투쟁 노선을 취하던 일본 공산당이 재일 조선인들의 활동에 동조하며 무장 투쟁을 펼치게 되었다.

경과

1952년 6월 24일 밤, 오사카 대학[大阪大學] 북쪽 운동장에서 ‘이타미[伊丹] 기지 분쇄, 반전, 독립의 저녁’이라는 집회가 개최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에 맞추어 전야제가 진행되었다. 검찰측 발표에 따르면 집회 참가자 수는 약 800여 명이라고 하였지만 『아사히신문[朝日新聞]』 1952년 6월 25일자 보도에는 학생 500명, 조선인 600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집회는 1952년 6월 25일 자정 무렵에 끝났는데 집회 후 참가자 중 약 400여 명이 한큐이시바시역[阪急石橋駅]에 모여서 귀가를 위한 임시 열차를 요구하였다[이들을 전차 부대라 한다]. 한큐 측은 2시간 후 이시바시와 오사카 간을 한 명 당 20엔 단체 할인 운임을 적용하여 운행하기로 합의하였다. 384명이 승차권을 구입해서 오전 3시 5분에 한큐이시바시역 출발하였으나 이시바시에서 네번 째 역을 지난 후 핫토리역[服部駅]에서 전원 하차를 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 외의 집회 참가자들은 마치카네산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가 오전 5시 반경에 전차 부대와 합류하였으며, 부근에서 경찰과 충돌하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경찰의 경비선을 넘어 국철 스이타[吹田] 조차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조차장에 진입한 목적은 한국 전쟁에 보내질 무기 운송을 방해할 목적이었지만 국철 측이 사전에 열차를 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고 끝났다. 그 후 집회 참가자들은 국철 스이타역으로 행진하는데 그 사이 경찰과 주일 미군 장교 등을 습격하였다. 1952년 6월 25일 오전 6시 40분 경에 스이타역으로 진입한 참가자들을 경찰이 둘러싸고 역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는 사이 집회 참가자들은 해산하게 되고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그대로 귀가하게 되었다.

결과

경찰은 300여 명을 체포하고 111명을 기소하게 되는데 1963년 6월 22일 오사카 지방 재판소는 소요죄와 위력 업무 방해죄는 무죄를 15명에 대해서는 폭력 행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어서 1968년 7월 25일 오사카 고등 재판소에서 소요죄 무죄, 46명에게 위력 업무 방해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1972년 3월 17일 최고 재판소의 상고 기각 결정으로 소요죄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참고문헌
  • 西村秀樹, 『大阪で闘った朝鮮戦争: 吹田·枚方事件の青春群像』(岩波書店, 2004)
  • 朴沙羅, 「事実をつくるー吹田事件と言説の政治」(『ソシオロジ』54-3, 2009)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