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쓰가와 사건

원어 항목명 小松川事件
한자 小松川事件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8년 8월 21일
전개 시기/일시 1958년 9월 1일
종결 시기/일시 1958년 2월
발생|시작 장소 일본 도쿄도
원어 항목명 小松川事件
관련 인물/단체 이진우|박수남
정의

1958년 일본 도쿄도 고마쓰가와 고교에서 발생한 여학생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재일 조선인 이진우가 체포되어 사형된 사건.

개설

1958년 8월 17일 도쿄 도립 고마쓰가와 고교 정시제에 다니던 여학생이 행방불명이 되고, 1958년 8월 20일 요미우리 신문에 범인으로 추측되는 남성으로부터 범행으로 보여지는 전화가 걸려 왔다. 고마쓰가와 경찰서가 주변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범행 현장을 찾지 못하고 장난 전화로 처리하였다. 1958년 8월 21일 다시 시체 유기 장소를 알리는 전화가 고마쓰가와 경찰서로 걸려 왔다. 경찰이 조사한 결과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옥상에서 피해 여학생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 후 범인은 요미우리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사건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는데 이를 경찰이 역탐지하여 범인이 전화를 걸었던 장소를 특정하였다. 그리고 녹음된 전화를 1958년 8월 29일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공개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제보가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 유력한 용의자로 같은 학교 1학년 남자 학생 이진우[당시 18세]가 체포되었다. 1958년 2월 도쿄 지방 법원은 강간 치사죄로 이진우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1962년 11월 1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역사적 배경

고마쓰가와 사건 배경에는 빈곤이나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지적되었으며, 오카 쇼헤이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 지식인들과 재일 조선인들에 의한 구명 운동이 일어났다. 오카 쇼헤이, 기시타 쥰지, 와타나베 가즈오 등은 ‘이진우 소년을 구하기 위한 기원’이라는 성명문을 내고 사건의 심리에 대한 신중과 사건의 배경에 대한 고려를 요구하였다. 또한 피해자의 유족도 이진우에 대한 감형을 요청하는 내용을 당국에 제출하였다.

결과

재일 조선인 저널리스트 박수남은 이진우와의 옥중 서한 기록을 통해서 이진우를 철학과 종교, 문학과 사회 과학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는 학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사건 당시에 나온 수 많은 평론과 창작물에는 이진우 무죄론과 국가에 의한 프레임업을 주장하는 담론도 생성되게 되었다.

특히 재일 조선인 2세들을 중심으로 이진우와 사건에 대한 사상적 검토가 진행되었다. 구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김달수이진우의 범죄를 ‘재일 조선인의 운명의 축도’라고 인식하고 이진우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과 민족의 문제를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고마쓰가와 사건은 당시의 젊은 세대에게 안겨준 충격이 대단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침묵의 자세를 보였다. 서경식은 북한 귀국 사업[북송사업]이 한창이던 무렵이었기에, 대부분의 재일 조선인들은 이진우와 자신이 동일시될까 우려하여 침묵과 무관심의 자세를 보였다고 지적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마쓰가와 사건과 그 진행 과정을 통해 부분적으로 밝혀진 이진우의 내면 세계는 그 자체로 한일간의 근현대 역사와 사상사의 교차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전후 일본의 탈식민화에 대한 회피를 엿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이진우 전서간집(全書簡集)』(新人物往來社, 1979)
  • 『在日コリアン辭典』(明石書店, 2010)
  • 조경희, 「‘조선인 사형수’를 둘러싼 전유의 구도: 고마쓰가와사건과 일본/조선」(『東方學志』15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2)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