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梁政明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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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政明事件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현대/현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70년 10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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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1년 |
발생|시작 장소 |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와세다 2-1-11 |
원어 항목명 | 梁政明事件 |
1970년 10월 6일 일본 도쿄도에서 재일 한인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여 양정명이 분신자살한 사건.
양정명은 1945년 6월 21일 야마구치현[山口県] 미네군[美祢郡] 쇼호정[秋芳町]에서 매우 가난한 재일 조선인 부부의 7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양정명이 아홉 살이던 1954년 가족이 전부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고 일본 이름 야마무라 마사하키[山村政明]로 개명하였다. 이후 직장과 대학 생활을 거치면서 재일 한인에 대한 차별과 귀화 문제로 갈등하다가 1970년 10월 6일 분신자살하였다.
양정명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고향의 우베[宇部]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졸업 후 현재의 마츠다[松田]주식회사의 전신인 동양공업에 입사하였다. 동양공업에서 양정명은 서무과에 근무하던 기독교인 여성과 사귀게 되었다. 그때 주고받은 편지는 유고집에 게재되어 있다. 두 사람이 사귀게 되자 양정명은 본인이 재일 조선인임을 사귀는 여성과 그 여성의 부모에게 알렸다. 그러자 그 여성의 부모는 헤어질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이후 동양공업을 퇴사한 양정명은 고학으로 1967년 와세다[早稲田]대학 제1 문학부에 입학하였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중퇴하였다. 이후 1968년에 야간인 제2 문학부에 재입학하였다.
양정명은 대학 입학 후 대학 투쟁에도 참가하며 기독교인으로 귀화에 관련된 의문을 가졌다. 특히 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정명의 누나가 취직 차별을 당하자 양정명은 한국인으로서 살아갈 생각을 하면서 대학 재학 당시 일본 조선연구소[현재의 코리아연구소]에 가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코리아연구소 측은 “일본에 귀화한 배신자는 두 번 다시 오지 말라.”라고 하면서 양정명을 거부하였다. 이후 일본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대학 투쟁 당시에는 학내 자치회를 지배하고 있던 신좌익계 당파에 반발하여 논섹트[무당파]학부유지연합을 지향한 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나 등교 방해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한국인으로 살기로 결심한 양정명은 동인지에는 한국명인 양정명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차별적인 일본 사회 속에서의 고뇌, 민족 차별에서 연유한 실연, 학생 운동 과정에서의 폭력, 경제적 어려움 등이 겹치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항의와 탄원서를 남기고 1970년 10월 6일 와세다대학교 부근의 아나하치만[穴八幡] 신사에서 분신자살하였다. 양정명이 남긴 유서에는 “이것은 피식민 지배하 이민족의 말로로써 이 나라 사회의 최저변에서 25년간 꿈틀거린 자의 현대 일본에 대한 자그마한 저항이기도 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양정명 사건은 1960년 말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 귀화를 민족과 조국에 대한 배신으로 인식하는 재일 조선인 사회 내의 갈등과 배제 등 다양한 모순들이 뒤섞인 양상을 보여 주었다.
양정명이 분신한 다음 해인 1971년에 유고집 『목숨 다 타버려도[いのち燃えつきるとき]』가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