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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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일본 교토부 우지시 |
시대 | 현대/현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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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부동산 회사 니시니혼쇼쿠산이 재일 조선인 마을인 우토로 마을을 상대로 퇴거 명령 및 건물수거토지명도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재판.
일제 강제 징용으로 생겨난 ‘우토로 마을’은 원래 교토부[京都府] 소유였으나 일본 패전 이후 닛산 차체로 소유권이 넘어가고 다시 1987년 부동산 회사 니시니혼쇼쿠산[西日本殖産]에 전매되었다. 주민들도 모르게 진행된 토지 매매 계약으로 우토로에 사는 재일 한인들은 강제 철거를 강요받으며, 불법 거주자로 취급되었다. 이후 거듭된 재판에서 주민 측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우토로’란 교토부 우지시[宇治市] 이세다초[伊勢田町] 51번지에 있는 재일 한인의 집단 주거지 마을 이름이다. 전시 중에 비행장 건설을 위해 동원된 한인들의 집단 거주로 형성된 마을이다. 2만 천㎡에 약 60여 세대 200여 명이 살고 있다. 우토로 지역이 형성된 것은 일본이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40년경으로, 당시 일본 정부는 전국 5곳에 군사 비행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교토에서는 군사 비행장 유치를 결정하고 현재 우지시와 구미야마초[久御山町]에 걸친 약 3,305,785㎡[100만 평]의 용지를 매수하고 건설을 담당할 국책 회사 명의로 등기를 하였다. 비행장 공사는 대부분이 수작업으로 하루에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종사하였고 그 중 1,300여 명이 한인이었다. 이들 노동자들의 거주처가 우토로 마을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자 우토로 지역에서 일본인 현장 감독과 국책 회사의 사원들이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우토로 마을은 한인들의 거대한 실업자 취락으로 남겨졌다. 우토로 마을의 소유권은 일본 패전 후 국책 회사의 뒤를 이은 닛산 차체공기[日産車体工耭][현재 닛산 차체]로 옮겨져 주민들은 ‘불법 점거’의 형태가 되었다. 닛산 차체는 상하수도 등 주거 환경 개선을 호소하는 주민과 대립하였고, 업적 부진에 의한 자산 정리를 이유로 1987년 3월 토지 전부를 자칭 자치 회장인 히라야마 마스오[본명 허창구]에게 매각하였다. 가격은 주변지가 보다 훨씬 싼 3억엔이었다고 한다. 히라야마 마스오는 두 달 후 우토로를 오사카시 부동산 회사 니시니혼쇼쿠산[西日本殖産]에 4억 4500만엔에 전매하였다. 부동산 회사는 전매 직후에 설립된 페이퍼 컴퍼니로 우토로는 이듬해인 1987년에 회사와 함께 다른 토건 회사에 매각되었고, 히라야마 마스오는 우토로 마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부동산 회사는 주민 측에게 명도할 것을 요구하고 1989년 2월 주민을 상대로 지구의 토지 구입 또는 퇴거를 요구하는 민사 소송을 교토 지방 재판소에 제기하였다. 주민 측은 시효 취득을 주장하였지만 재판소는 주장을 물리치고 2000년에 주민 측의 패소를 확정하였다.
2000년 11월 최고 재판소에서 주민 측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후 법적으로는 강제 집행 가능한 상태가 계속되어 2005년에는 교토 지방 재판소가 빈집 1곳의 강제 집행을 공시하였지만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5년에는 한국 NGO 등에 의한 우토로 실태 조사가 시행되고 한국인들의 모금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우토로 민간 기금 재단이 설립되어 2750.52㎡[832평]를 매입하였고, 2011년에 한국 정부 지원금을 관리하는 ‘우토로 재단 법인’이 땅 3808.4㎡[1,152평]를 매입하였다. 2016년 현재 우토로 마을의 1/3을 구입하였으며, 2020년에는 부지에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새로운 주택 2개 동이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