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金嬉老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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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嬉老事件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일본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
시대 | 현대/현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68년 2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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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75년 11월 4일 |
발생|시작 장소 | 일본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
원어 항목명 | 金嬉老事件 |
관련 인물/단체 | 김희로[본명 권희로(權嬉老)] |
1968년 2월 일본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의 카바레에서 재일 한인 김희로가 폭력 단원 2명을 총으로 사살한 사건.
김희로(金嬉老) 사건은 1968년 2월 20일 재일 한인 2세 김희로[본명 권희로(權嬉老), 당시 39세]가 금전 문제로 시즈오카시[靜岡市]의 카바레에서 폭력 단원 2명을 총으로 사살한 사건을 말한다. 사건 직후 스마타쿄 온천[寸又峽溫泉]으로 도주한 김희로는 온천 여관에 숙박하고 있던 13명의 손님과 종업원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다가 88시간 후에 보도진 틈에 섞여 들어온 경관에게 체포되었다. 김희로가 대치하고 있을 때 취재하러 온 매스컴에 자신이 받아온 조선인 차별을 제기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전후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지속적인 민족 차별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968년 6월부터 시작된 재판에서도 김희로는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을 빼고는 사건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하며 사건의 배경에 있는 일본의 민족 차별에 대해 계속 호소하였다. 김희로는 재판에서 재일 조선인 차별 실태를 밝히기 위해서 19명의 특별 변호인을 신청하였다. 처음에 재판소는 김희로의 신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김희로는 특별 변호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출정을 거부하겠다고 주장하여, 결국 세 번째 공판에서 특별 변호인 1명이 인정되었다. 재판에서는 차별 문제를 법정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검찰 측과 조선인 차별 문제를 빼고는 재판할 수 없다는 피고 측의 공방이 벌어졌다. 3년이 걸린 재판의 결과로 1972년 6월에 김희로는 무기 징역을 언도받았다. 공소(控所)를 제기하였으나 1974년 6월에 도쿄 고등 재판소[東京高等裁判所]에서 기각되어, 1975년 11월 4일에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김희로는 구마모토 형무소[熊本刑務所], 후츄 형무소[府中刑務所], 지바 형무소[千葉刑務所] 등으로 옮겨 다니며 복역하였다.
김희로는 1999년 9월 구속된 지 31년 만에 석방되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김희로는 김해 공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일본을 떠나는 자신의 심경은 매우 복잡하였다고 수기에서 밝힌 바 있다.[김희로, 『나는 살았다』, 新潮社, 1999] 일본 정부가 끝까지 일본 국내에서의 ‘보호 관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대로 옥중에서 죽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국으로 귀국할 것인가 하는 고뇌의 선택을 강요당한 김희로는 망설임 끝에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법무 당국은 “사건으로부터 30년 이상이 지났고, 본인도 고령이 된 점이나 한국의 승려가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가출옥(假出獄)의 여건이 갖추어졌다”라고 해명하였다.
김희로 사건은 전후 일본 사회에 내재해있던 심각한 민족 문제를 매스컴을 통해 많은 일본인에게 알린 상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김희로 사건은 국내에도 크게 보도되어 한국인이 재일 교포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사건의 배경과 경위에 대해 김희로 공판 대책위원회(金嬉老公判對策委員會)에서는 『김희로 문제 자료 집성(金嬉老問題資料集成) 상·하』[むくげ舍, 1982]를 간행하였다. 1992년 한국에서 ‘김희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김의 전쟁」[김영빈(金永彬) 감독]이 제작·개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