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원어 항목명 朝鮮建国促進靑年同盟
한자 朝鮮建國促進靑年同盟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도쿄도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5년 11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50년 8월 28일
원어 항목명 朝鮮建国促進靑年同盟
정의

1945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결성된 재일 한인 청년 단체.

개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일본에 남아 있는 재일 한인들은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단체들을 결성하였다. 1945년 10월 재일조선인연맹이 결성되었다. 재일조선인연맹의 주도권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자 이에 대응하여 우익 인사들도 단체를 결성하였다. 1945년 11월 홍현기, 김상호, 허운용, 박원순 등은 친일파와 반공주의자를 집결하여 11월 16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결성 당시 위원장은 홍현기, 부위원장은 서종실과 허운용이었다. 허운용의 이탈로 이희원이 부위원장을 승계하였다. 결성 당시 위원장은 홍현기, 부위원장은 서종실과 허운용이었지만 『민단 50년사』에 의하면 허운용은 누락되어 있다. 기관지로 『조선신문』과 『청년』을 간행하였다.

설립 목적

결성 취지에 의하면 “완전한 자주 독립국인 조선 건설을 목표로 이론의 연구와 실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강령으로 완전 자주 독립 국가의 긴급 실현을 위한 조선 청년의 대동단결, 청년의 창조성을 발휘하여 신조선을 건설하는 것이 있다. 또 국가적 사업 추진을 위해 청년 건설대 편성, 재일동포의 민생 안전, 국제 친선과 세계 평화 건설에 공헌할 것을 제시하였다.

변천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은 국내의 정치 세력에 따라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지지와 김구의 남북 협상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국내에서 분단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단독 선거와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과 남북 협상과 통일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화되었다. 1946년 9월 25일에 신조선건설동맹이 거류민단결성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자 1946년 9월 28일에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에 합류하였다. 그렇지만 조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1948년 3월에 전체 대회에서 단독 선거 반대와 협상 노선 지지를 결의하고, 위원장에 전두영, 부위원장에 서종실과 박근세를 선출하였다. 1948년 7월 임시 대회에서 이승만 정권 지지를 결의하고 위원장에 홍현기 부위원장에 박근세와 현효섭을 선출하였다. 이에 대해 이강훈 등 남북 협상과 통일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의를 제기하고 조선 통일민주동지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은 대한민국의 요청에 따라 해소하고 1950년 8월 28일에 재일본대한청년단으로 재조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6년 국내에서 신탁 통치가 발표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지지하였다.

참고문헌
  • 『民團五十年史』(在日本大韓民國民團中央本部, 1997)
  • 정용하, 「재일한인 통일운동에 나타난 연대·네트워크」(『한일민족문제연구』12, 한일민족문제학회, 2007)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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