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在日本朝鮮人連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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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在日本朝鮮人聯盟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설립 시기/일시 | 1945년 10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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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49년 9월 8일 |
원어 항목명 | 在日本朝鮮人連盟 |
1945년 일본에서 결성된 재일 한인의 전국 조직.
해방 직후 일본 각지에서는 재일 한인의 귀국, 생활, 민족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해 자연 발생적으로 여러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이를 통합하여 전국적으로 조직화하기 위해 1945년 10월 15일, 16일에 재일본조선인연맹 중앙총본부 결성 대회가 열렸다.
1945년 10월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임원은 위원장으로 YMCA 운동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근(尹槿), 부위원장 김정홍(金正洪), 김민화(金民化), 총무부장 신홍식(申鴻湜), 재무부장 박용성(朴龍成), 정보부장 김두용(金斗鎔), 외무부장 이병석(李秉晳), 문화부장 이상요(李相堯) 등이었다. 재일본조선인연맹은 결성 과정에서 좌익 세력이 주도권을 잡게되었다. 이로 인해 조련에서 탈퇴한 우익 세력은 1946년 10월 3일에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을 결성하였다. 1948년 이후 GHQ와 일본 정부의 공산주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재일본조선인연맹과도 대립이 심해져 ‘북한 국기게양사건’, ‘한신 교육투쟁’ 등이 일어났다. 1949년 9월 8일에는 GHQ가 재일본조선인연맹을 ‘「단체 등 규정령」’에 의거하여 “폭력주의적 단체”로 규정하고 해산을 명했다. 이때 재일본조선인연맹의 자산도 몰수당했다. 1949년 10월 달에는 재일본조선인연맹계 민족 학교에 대한 ‘제2차 폐쇄령’이 내려졌다. 재일본조선인연맹의 구성원은 해산 시에 약 36만 6000명이었고, 같이 해산당한 산하 단체 중 하나인 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의 구성원은 약 3만 명이었다.
재일본조선인연맹의 강령은 “신조선 건설에 헌신적 노력을 기한다.”, “세계 평화의 항상적 유지를 기한다.”, “재일 동포의 생활에 안정을 기한다.”, “귀국 동포의 편의와 질서를 기한다.”, “일본 국민과의 호양 우의를 기한다.”, “목적 달성을 위해 대동단결을 기한다.”였다. 재일본조선인연맹의 산하 단체로는 재일본조선학생연맹, 재일본조선인전국교육자동맹, 재일본조선민주여성동맹, 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 재일본조선인상공회연합본부 등이 있었고, 『민중신문』과 『우리신문』, 『해방신문』 등이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재일본조선인연맹은 발족 당초부터 재일 한인을 대상으로 한 사업, 즉 귀국자들에 대한 지원, 실업 및 생활 문제 해결, 아이들에 대한 민족 교육, 반봉건적 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사회 계몽 교육 등에 힘썼다. 또한 재일 한인의 생활권 확립을 목표로 일본 공산당 계열의 단체들과 함께 일본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펼쳤고, 한반도의 새로운 독립 국가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대표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재일본조선인연맹은 1946년 2월에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산하 단체였는데, 1948년 9월에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경축 대회를 개최하고 10월 제5회 전국 대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 정부 지지”를 행동 강령으로 채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