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운동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1921년 흑도회 결성 전후부터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이 전개한 사상운동.

개설

아나키즘은 고대 그리스어 ‘anachos’에서 나왔다. ‘키잡이가 없는 배의 선원’이란 뜻이다. an[없다]과 archy[지배자]의 합성어로서 ‘무지배, 무권력’의 의미이다. 따라서 아나키즘(anarchism)은 ‘무지배[강권]주의’로 번역되어야 정확한 표현이다. 아나키즘은 권력자나 국가·정부와 같은 권력 기관의 강권 지배를 혐오하고, 인간의 자유에 최고 가치를 두는 사상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1902년 일본 도쿄 제국 대학교 철학과 학생이던 게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가 러시아 허무당과 서구 아나키스트들을 소개하는 책을 『근대 무정부주의』로 번역해 출간하면서 ‘무정부주의’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무정부주의는 지배 세력으로부터 파괴와 암살, 혼란과 무질서 등을 유도하는 과격한 사상으로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아나키스트

일본의 근대 아나키즘은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반대 운동을 펼치던 평민사(平民社)에서 시작되었다. 평민사의 편집인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는 옥중에서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접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엠마 골드만의 생디칼리즘에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고토쿠 슈스이는 귀국 후 『평민신문(平民新聞)』과 아주화친회(亞州和親會) 등을 통해 반전·반제국주의 사상의 선전을 꾀하였다. 일본 정부는 고토쿠 슈스이와 일부 청년들을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체포하여 대역 사건(大逆事件)으로 1911년 사형에 처하였다. 이후 일본의 아나키즘 운동은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오스기 사카에는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에 일본 헌병 대위에게 살해되었고, 이후 일본의 아나키즘은 사회적 영향력을 급속히 잃고 말았다.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

일본에서 최초로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한 단체는 1921년 11월 결성된 최초의 사상단체 흑도회(黑濤會)이다. 오스기 사카에와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등에게 영향을 받은 조선인 고학생 동우회 회원이던 박열(朴烈)·정태성(鄭泰成) 등이 백무(白武)·김약수(金若水) 등 공산주의 계열 유학생들과 함께 조직한 단체이다.

1922년 10월 사상적으로 분열하여 박열 등의 아나키스트는 흑우회(黑友會)를, 김약수 등의 공산주의자는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조선인 아나키즘 운동은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와중에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황태자 암살 사건으로 비화시킨 박열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박열의 뒤를 이은 아나키스트들은 불령사(不逞社), 흑풍회(黑風會), 흑우연맹(黑友連盟) 등으로 조직을 확대하며 운동을 계속하였다. 「사회 운동의 상황」에 따르면, 1929년의 조선인 아나키스트 세력은 15개 단체, 335명이었고, 최전성기였던 1932년에도 13개 단체, 1,026명에 그쳤다. 1932년 공산주의 세력은 119개 단체에 13,844명이었기에 10분의 1로 열세였다. 도쿄에서는 조선 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과 조선 자유노동자조합(朝鮮自由勞動者組合)이라는 노동자 조직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에 대항하면서, 동시에 친일 반동 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도 격렬하게 항쟁했다. 나아가 이들은 항일 선전물의 발간과 민족 차별 반대 투쟁, 노동조합 활동과 소비자 및 생활 협동조합, 비밀결사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민족 운동을 펼쳤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더 이상 공개적인 활동을 펼치기 어렵게 되었다. 재일 아나키스트들은 국내로 돌아가거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 단체와 무장 조직에 가입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는 출옥한 박열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단장에 임한 것을 비롯하여 다른 아나키스트들도 다수가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 등에서 활동하였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남북 평화 통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 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이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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