쵸자 탄광

원어 항목명 長者炭鉱
한자 長者炭鑛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지명/시설
지역 일본 사가현 이마리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최초 설립지 일본 사가현 니시마쓰우라군
원어 항목명 長者炭鉱
성격 탄광
정의

1897년 탄광부로 조선인을 최초로 고용한 일본 사가현 니시마쓰우라군에 있는 탄광.

개설

쵸자[長者] 탄광은 이마리만[伊万里湾] 서안[西岸], 사가[佐賀]현 니시마쓰우라[西松浦]군[현재, 이마리시[伊万里市]]에 있었던 탄광이다. 개광 시기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문 기사나 『광구일람』 등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77년에 발간된 『명치전기비전석탄기업사료집(明治前期肥前石炭磯業史料集)』에 실린 「광산연혁조(鉱山沿革調)」에 의하면, 1839년경에 니시마쓰우라군의 석탄 채굴이 시작되었고, 상품성을 갖춘 채굴은 1868년경 이후로 알려져 있다.

쵸자 탄광이라는 명칭이 처음 발견된 시기는 1894년 「시굴채굴채취일람표(試掘採掘採取一覧表)」이다. 일람표에 의하면, 광산 명칭은 쵸자이고, 광업인은 사족 출신의 히가시지마[東島猷ー][생몰 연대 미상]로 기재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히가시지마가 1890년 2월 미쓰비시사[三菱社]로부터 사가현 오기군[小城郡] 고가산[古賀山] 탄광을 양도해 탄광업에 뛰어든 점을 감안해 쵸자 탄광 개광 시기를 1890~1895년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1891년부터 1893년까지 탄가가 좋지 않아 신규 개광은 곤란했을 것이므로 청일 전쟁 직후인 1895년경에 본격적으로 탄광을 가동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1895년 6월 쵸자 탄광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1주일에 걸쳐 신문에 ‘갱외일용노동자(坑外日雇稼人)’모집 광고를 냈다. 1896년 10월에는 기존에 채굴한 탄층 아래에 우량한 탄전을 발견했고, 1897년에는 400명 이상을 고용해 매일 120톤을 출탄하렸다. 그러나 노동자 탈출과 쟁투 사건으로 1898년 5월 기준 조선인 노동자 수는 150명으로 줄었다. 1897년부터 시작한 쵸자 탄광의 조선인 모집은 1898년 2월 8일에 50여 명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쵸자 탄광은 ‘천재(天災)로 인해 크게 실패 하고 폐업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폐산일은 확인할 수 없다.

변천

청일 전쟁 후 시장 확대에 따라 석탄 산업이 호황을 맞게 되면서 사가현 관내에서 심각한 탄광 노동자 부족 현상을 맞게 되자 쵸자 탄광 주인 히가시지마는 외국인 노동자 집단 이입을 계획하였다. 히가시지마는 1896년 12월에 중국인 노동자 고용을 위해 나가사키[長崎]현 지사와 상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지사가 조선인 노동자 고용을 권했고, 동석했던 나가사키현 외사과장도 찬성하자 조선인 고용을 결정하고 1897년 5월 조선어 통역인 고미네[小峯源作]에게 모집을 의뢰하였다. 쵸자 탄광 측은 당초 시험적으로 50명을 고용하고 점차 숫자를 늘려 탄부 전체를 조선인으로 충당하려고 생각하였다. 총 59명[탄부 57명, 취사인 2명]이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도착하였다. 1897년 8월 2일, 제1반(班) 20명이 인천항을 떠나 6일에 나가사키항에 도착한 후 다시 해상에서 배를 갈아타고 7일에 쵸자 탄광에 도착하였다. 1897년 8월 11일에는 제2반 37명이 동일한 방법으로 이마리만에 도착하였다. 제2반 도일 당시에는 주한일본공사와 경성과 인천의 영사 등이 적극 협조해 원활한 송출이 되도록 조치하였다.

쵸자 탄광에 온 조선인 탄부 57명은 18~36세[평균 연령 25.6세]의 건장한 남성이었으며, 출신지는 경성 34명, 부산 16명, 평안도 2명, 기타 5명이었다. 경성과 부산에 집중된 이유는 ‘최초의 도일 노동자이므로 일본 거류민이 많은 지역에서 일본과 언어 풍속에 낯설지 않은 자’를 대상으로 선발했으며, 조선 거류 일본인 집에 고용 경험이 있는 자도 1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같이 제1회 59명[탄부 57명]이 쵸자 탄광에 들어온 후 제2회 40명[10월 6일 신문기사], 제3회 77명[11월 25일 신문기사], 제4회 54~56명[1898년 2월 8일 신문기사] 등 총 4회에 걸쳐 약 230명 정도가 쵸자 탄광에 고용되었다. 조선인들은 모두 1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일본인 거류 지역에 거주하거나 일본인 고용 경험이 있는 남성이었다. 회사 측은 1개 반 20명을 4개조로 나누어 숙련 갱부 1인이 조선인들의 채탄 작업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1897년 9월 19일~10월 1일까지 『모지신보(門司新報)』에 연재된 「초자 탄광의 조선 노동자(長者炭坑に於ける朝鮮労働者)」에 의하면, 모집인 고미네가 회사와 청부 관계를 맺었으므로 쵸자 탄광의 조선인들은 중층적 하청 구조 아래 놓였다. 고미네는 조선인 모집과 결원 충원은 물론이고 단속을 책임지는 나야가시라[納屋頭]였다. 나야가시라는 현재 인력파견업체같은 역할을 하는 청부업자이다. 고미네는 탄광 경험이 없었으므로 갱내 노동을 직접 지휘할 수는 없었으나 조선어를 통해 입갱과 출탄을 독려하였다. 탄광 회사 측은 나야가시라 역할에 대한 대가로 매달 노동자의 월급 가운데 1할 5분을 공제해 고미네에게 지급하였다. 고미네는 고용한 조선인 20명씩으로 나누어 그 가운데 일본어 능력자를 중간 관리자(頭取, 20인長)로 두고 조선인을 관리하였다.

회사 측은 1반 20명이 도착 후 다음날부터 바로 갱에 투입해 채탄 작업을 시작하도록 했고, 2반 37명은 도착일이 일본 명절인 오봉[旧盆] 연휴 중이어서 3일간 휴업했으므로 15일부터 채탄에 투입하였다. 전원이 채탄 경험이 없는 초보자였으나 제대로 된 교육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하였다. 이들의 입갱율은 매우 높았고, 채탄 성과도 높았으므로 탄광 측은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규정에 따르면, 노동 시간은 1일 2교대[오전 6시-오후 6시까지]이고 휴업일은 매월 3회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소 규모 탄광에서 근무 규정은 유명무실했으므로 조선인들의 노동 상황은 더욱 열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무 관리자의 기록에 의하면, 대다수 노동자들이 규정보다 2~3시간 이른 오전 3~4시경부터 갱에 들어가거나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오후 12시까지도 갱에서 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주택이 아니라 제2갱 부근에 마련한 3채의 나야[納屋]에서 생활했는데, 일본인 노동자와 격리된 생활이었다. 이들의 평균 임금은 월 47전 78리였다. 이 임금을 당시 쵸자 탄광 일본인 탄부와 비교할 수 있는 사료가 없으므로 치쿠호[筑豊] 4개군 당시 일본인 평균 임금 59전 5리와 비교하면 약간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인들이 임금을 모두 수령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임금은 다양한 종류의 공제금과 저축으로 처리되었고, 용돈 정도에 해당하는 지급액도 현금이 아니라 사적 임금 전표 형태인 티켓[切符]으로 지급해 탄광 회사 측이 운영하는 가게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탈출을 방지하고 임금 지급을 보류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임금 지급 방식에 대한 조선인들의 불만은 매우 높아서 탈출의 원인이 되었다.

1897년에 조선인이 쵸자 탄광에 들어온 후, 탈출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현지 언론은 쵸자 탄광 조선인 노동자의 탈출 사건에 대해 여러 차례 보도하였다. 최초의 탈출자는 1897년 10월 12일에 탈출한 2명의 조선인[김학봉(金鶴鳳), 김천왕(金千王)]이다. 이들은 제1회 도일자[57명] 일원으로 입갱 후 2개월 만에 탈출하였다. 이후에도 탈출자는 속출했고, 이듬해인 1898년 1월에는 ‘쟁투 사건’이 발생해 60명이 집단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초기 탈출자는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적발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1898년 3월 하순에는 쵸자 탄광 탈출 조선인 6명이 인근 미쓰이미이케[三井三池] 탄광에 취업하기도 했다. 이들의 탈출 이유는 임금 지급 방식에 대한 불만이었다. 1898년 5월에는 교토[京都] 지역에서 발견될 정도로 탈출자의 이동 경로는 확대되었다. 당시 언론에서 분석한 탈출 이유는 조선인에 대한 갱내 노동 가동률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회사 측은 탈출 사건 발생 후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단속을 더욱 엄중하게 하고 적발된 탈출자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취급했으나 탈출은 줄어들지 않았다.

또한 1898년 1월 22일[음력 설날] 대규모 쟁투 사건으로 60여 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현지 언론이 보도한 「예심결정서(予審決定書)」에 의하면, 음력 정월을 맞아 회사 측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약간의 음식과 술을 나누어주고 식사하던 중 말싸움이 일어나 고미네가 제지하자 노동자 3명이 고미네에게 폭력을 가해 전치 20일의 상해를 입혔다. 이 소식이 탄광에 알려지자 일본인 1인이 둔기와 칼로 고미네를 폭행한 조선인을 폭행해 전치 17주의 상해를 입혔다. 또한 다른 일본인이 조선인 합숙소인 나야로 몰려가 전치 20일 이상의 상해를 입히고 안구를 찌르는 등 다수의 일본인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폭력과 창상을 가하였다.

예심 결정서에 명시된 조선인 3명이 고미네를 공격한 이유는, 고미네가 조선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감언이설로 데려왔으나 허위 모집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의 예상과 달리 전혀 경험이 없는 채탄 작업에 무리하게 투입했으며 채탄 도구 사용료를 임금에서 공제하고, 임금을 중간에 갈취하는 등 당초 약속과 차이가 많이 나자 조선인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탈출한 60여 명은 각지를 유랑하거나 귀국해, 조선인 유학생 김명원(金明遠)이 1898년 5월에 모지[門司] 경찰서에 보고할 당시 조선인 수는 150명으로 줄었다. 이 사건 재판은 1898년 4월 1일, 사가 지방 재판소에서 열려 1898년 6월 7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공판 결과, 피고인 15명[조선인 3명과 일본인 12명] 가운데 고미네를 폭행한 조선인 3명은 중금고 4월 15일, 일본인 2명은 각각 중금고 1년 2월과 2년 6월에 처해졌다. 8명은 증거 불충분이나 폭력 사실 미확인으로 석방되었고, 2명은 기타 사유[관할 변경과 다른 사건으로 복역 중]로 마무리되었다.

현황

쵸자 탄광은 최초로 조선인 탄부가 고용된 탄광이다. 1897년 8월부터 1898년 2월까지 들어 온 조선인들은 중층적 하층 관계에 놓여 일본인 노동자나 지역 사회에 엄격히 격리되었으며, 채탄에 필요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언어도 소통하지 않은 열악한 상태에 놓였다. 모집 당시의 약속과 달리 폭력적 억압과 임금 지급의 불투명, 가혹한 노동 조건 아래에 놓여 있었던 조선인들의 불신과 불만은 처음에는 소극적 저항의 방법인 탈출로 나타났으나 이후에는 적극적 방법인 쟁투사건으로 표출되었다.

참고문헌
  • 金贊汀, 『在日コリアン百年史』(三五館, 1997)
  • 東定宣昌 , 「明治期, 日本における最初の朝鮮人労働者 一 佐賀県長者炭坑の炭坑夫」(『經濟學硏究』57, 九州大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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