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鴻之舞鉱業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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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鴻之舞鑛業所 |
영문 | Gonomai mine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일본 홋카이도 몬베쓰시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鴻之舞鉱業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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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주소 | 日本国北海道紋別市鴻之舞住吉町 |
GPS 좌표 | https://www.google.com/maps/dir/%E9%B4%BB%E4%B9%8B%E8%88%9E%E5%96%9C%E6%A5%BD%E7%94%BA/%E9%81%93%E9%81%93305%E5%8F%B7%E7%B7%9A,+%E6%97%A5%E6%9C%AC,+%E3%80%92094-0026+%E5%8C%97%E6%B5%B7%E9%81%93%E7%B4%8B%E5%88%A5%E5%B8%82%E9%B4%BB%E4%B9%8B%E8%88%9E%E4%BD%8F%E5%90%89%E7%94%BA/@44.134722,143.348611,15z/data=!4m13!4m12!1m5!1m1!1s0x5f129e40031460b7:0xac370749b1959b91!2m2!1d143.34849!2d44.1320954!1m5!1m1!1s0x5f129e705230ae99:0xe850c11b7c4fa6d1!2m2!1d143.3440372!2d44.1425463?hl=ja |
성격 | 광산 |
일본 홋카이도 몬베쓰 지역에 있었던 스미토모 소속 금은동 광산.
고노마이 광업소는 홋카이도[北海島] 오호츠크해 연안 왓카나이[稚内]시와 아바시리[網走]시의 중간 지점에 있는 몬베쓰[紋別]시로부터 내륙으로 약 30km 안에 들어간 산중에 있다. 이 지역은 사방이 해발 300~600m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11월부터 4월까지 눈에 묻혀 있으며, 현재도 곰이 서식하는 곳이다. 오호츠크해 연안은 1897년부터 사금이 발견되어 골드 러쉬가 시작되었으며, 고노마이[鴻之舞] 광업소는 1917년 스미토모[住友]가 경영권을 얻어 광물을 채광하기 시작하였다. 3개 지갱을 운영하였고, 1973년까지 조업하였다.
고노마이 광업소는 금·은·동을 산출하는 홋카이도의 대표적인 광산으로, 1942년에 광산 전성기를 기록하였다. 광산 노무자와 거주 가족이 증가해 1942년경에는 인구 13,0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1937년에 시작한 중일 전쟁의 장기화로 일본인 광산 노동자가 차례로 징병되어 조업에 지장을 초래하자 스미토모는 1939년부터 일본 정부의 ‘노무 동원 계획’에 근거하여 조선인 노무자를 이입하기 시작하였다. 스미토모 고노마이 광업소도 1939년 첫 조선인의 이입 이래 매년 꾸준히 조선에서 노무자를 동원하였으며, 1942년 6월말에는 이입 총 인원수가 2천 명을 넘었다. 1939년 10월 7일에 광산에 입산한 제1진부터 제23진까지[1942년 9월 22일 입산]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총수는 2,563명이다.
1942년 말부터 태평양 지역 해전에서 일본이 참패를 거듭하자 산업 통제의 일환으로 금은 군수물자로는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광물로 여겨졌다. 상공성은 1942년 11월 30일에 ‘금광업조정령’을 발표하고 금광산의 보·휴·폐광과 ‘설비 및 노동력의 배치 전환 등’에 관한 내시(內示)를 결정하고, 1942년 12월 26일 전국 주요 금광산 대표자들에게 정식으로 보·휴·폐광을 명령하였다. 이어서 1943년 1월에 각의 결정 ‘금광업 정비에 관한 건’에 의해 전국 금속 광산에는 ‘금광산 정리에 따른 종업자 배치 전환 취급 요령이 하달되고 이 요령에 의해 배치 전환 계획에 착수하게 되었다. 1943년 3월, 일본 각의 결정에 따라 전국 470개 금광산의 휴·폐산이 결정되고, 4월 1일자 ‘금광업정비령’ 실시되자 홋카이도 내 30개 금광산도 일제히 폐산식을 하였다. 이어서 보갱 광산 2개소와 기타 2개소를 남기고 휴산 조치가 내려졌다. 이 결정에 따라 고노마이 광업소의 노무자들은 홋카이도 폰베쓰[奔別] 탄광과 도치키[栃木]현 후루카와[古河] 광업소, 아키타[秋田]현 하나오카[花岡] 광업소, 에히메현[愛媛] 벳시[別子] 광산, 나라[奈良]현 가나야후치[金屋淵] 광업소 등 다른 탄·광산으로 전환 배치되었고, 고노마이 광업소에서도 3개 지갱 가운데 이나우시[伊奈牛] 광산을 제외한 고노마이 광산·야소시[八十士] 광산 소속 노무자들은 전출되었다.
이 조치에 따라 고노마이 광산에서 일을 하던 조선인 1,168명[가족 구성 세대 116호]과 가족 359명 등 총 1,527명이 다른 지역 탄광산으로 전출했고, 그 외 일시귀선 중 미복귀자는 해고 조치를, 질병 요양 중인 112명 가운데 일부는 귀선(歸鮮)를 조치하였다.
스미토모는 일본 3대 재벌의 하나로 평가받는 대기업인데, 에도[江戶] 막부 시기에 교토[京都]에 설립한 후지야[富士屋]를 발상지로 개창해 벳시[別子] 동광산을 토대로 1919년에 그룹을 설립하였다. 금속, 통신, 전기, 광업, 화학 등의 계열사를 경영하였다. 스미토모 광업은 1944년 4월 25일에 제2회 지정 군수 회사로 지정되었다. 일본 전시 체제기에는 120개 기업에 투자하였고 자본금이 100억 엔을 넘을 정도로 큰 기업이었다. 일본 전국에 50개 작업장을 경영하였고, 한반도와 사할린 등 제국 일본 영역에 100여 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렸다. 1945년 10월에 연합군 총사령부[GHQ]가 본사의 해산을 공식화했으나 전후 재건하여 현재 스미토모 상사, 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스미토모 금속 공업 등 20여 핵심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고노마이 광업소는 1937년 스미토모가 스미토모 광업 주식회사를 설립하자 스미토모 광업 소속이 되었다가 1946년 세이카[井華] 광업으로 개칭하였고, 1952년 금속 부분을 분리해 스미토모 금속광산이 되었다. 1973년에 폐산하였다.
일본 패전 후 고노마이 광업소는 조업을 재개했으나 1973년 폐산되었고, 고노마이 광업소가 생산한 각종 문서는 광산 사무소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8년 경제학자 모리야 요시히코[守屋敬彦]가 발견해 2톤 트럭 5대 분량의 자료를 몬베쓰시립 향토 자료관에 이관하였다. 현재 자료 열람은 불가능하다. 모리야 요시히코는 자신이 발굴한 고노마이 광업소 문서 일부에 홋카이도 관내 여러 기관에 분산되어 있었던 관련 자료를 추가로 수집 정리해 기록물의 결락을 보완한 후, 십수년간 공을 들여 정리 분석한 주요 내용을 『전시외국인강제연행관계자료집(戰時外國人强制連行關係資料集)』으로 편집하여 공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