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茅沼炭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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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茅沼炭鑛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일본 홋카이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준공 시기/일시 | 18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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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64년 |
원어 항목명 | 茅沼炭鉱 |
성격 | 탄광 |
1929년부터 조선인이 채광에 동원된 홋카이도 최초의 탄광.
가야누마[茅沼] 탄광은 홋카이도[北海道] 남서부 샤코탄[積丹] 반도 연안의 도마리무라[泊村]에 있었던 홋카이도 최초의 탄광이다. 가야누마 탄전에 속한 탄광이다. 1863년 개광 이후 1964년 폐산될 때까지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장수광(長壽鑛)이다. 1929년부터 조선인 광부가 채광하였으며, 1939년부터는 조선인을 강제 동원하였다.
가야누마 탄전은 샤코탄[積丹] 반도 서해안 이와나이쵸[岩內町]에서 북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후루우군[古宇郡] 도마리무라[泊村] 가야누마[茅沼] 지구를 중심 채굴 지역으로 하고 있는 탄전이다. 석탄 매장량에서 가야누마 탄전은 그리 큰 규모의 탄전이 아니어서 채탄량은 홋카이도 전체 생산량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가야누마 탄전은 안세이[安政] 연간[1854~1859년]에 홋카이도 구시로[釧路]의 시라누카[白糠] 탄전과 함께 발견되었다.
가야누마 탄광은 1863년에 개광하였다. 가야누마[茅沼]란 아이누어로 ‘배의 재료를 구하는 곳’을 의미하는 ‘카야노마이’에서 유래하였다. 가야누마 탄광의 채굴 광구는 가야누마 지구를 남서로 흐르는 다마카와[玉川]에 의해 형성된 계곡 양측으로 있고 약 1,420㏊ 규모이며, 해안으로부터 거리는 3~4㎞로 해안부에 있는 탄전이다. 탄전의 면적은 10여k㎡이다. 도내(道內) 주요 탄전인 이시카리, 구시로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규모이다.
가야누마 탄광이 홋카이도에서 가장 빨리 개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막부 시대에 시작된 일본해 연안의 어장 개발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막부 시대에 홋카이도는 연안 어업이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폐쇄적인 어장 경영 제도가 중심이었으나 청어 잡이를 중심으로 어업이 전개되었다. 17세기 초부터 번성했던 이와나이쵸[岩内町], 도마리무라[泊村], 가모에나이무라[神恵内村] 등 샤코탄 반도 서해안 지역 어장이 18세기말에 마쓰마에[松前], 에사[江差] 지방의 어류 감소로 인해 어업의 중심지가 옮겨옴에 따라 샤코탄 반도 서해안 지방의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어부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탄광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정한 노동력도 확보할 수 있었다.
1854년에 일본이 미국과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맺어 하코다테[箱館, 函館]를 개항한 후 항구에 외국 기선이 기항을 하자 기선 연료로써 석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막부도 석탄의 필요성을 인식하던 중 가야누마에서 석탄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야누마는 막부 시기에 이와나이 관내에 속한 어장이었는데, 1856년 음력 4월 12일, 이 어장에 인접한 산에서 나무를 구하러 입산한 어부가 우연히 석탄 덩어리를 발견하면서 탄광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석탄 발견 소식을 접한 막부는 채굴을 서둘러 구시로의 시라누카[白糠]와 시리베시[後志], 가야누마[茅沼] 탄전 개발에 착수하였으나 채굴은 중단되었다. 가야누마 탄전이 단속(斷續)된 탄층으로 인해 천장 붕괴가 이어져 사업 수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가야누마에서 채굴을 중지하고, 시라누카 탄전에서만 계속 채굴하다가 증기선에 공급할 석탄이 시급하게 되자 1863년에 정식 개광하고 1864년부터 채탄을 시작하였다.
가야누마 탄광은 처음에 막부가 직접 경영했으나 메이지[明治]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가 경영하다가 민간에 이양하였다. 1856년부터 1868년까지 막부가 운영했고, 1884년~1887년간은 무사이[武井], 나가하마[長濱]가 제1 채탄 조합을 결성해 운영하였다. 특히 1869년에 개척사 시기로 이어지며, 관영이 폐지되기까지 15년간 석탄 채굴의 기초 확립기라 할 수 있는 과정을 밟았다. 1888년부터 1896년간 나가하마가 중심이 되어 제2 채탄 조합을 결성해서 운영을 하다가 우콘[右近] 탄광과 후지야마[藤山] 탄광을 비롯한 8개 탄광이 운영 주체를 이루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통합이 되어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가야누마 탄광 광업소가 경영했고, 1918년부터 1929년까지 사와구치[沢口] 기선 광업주식회사가 운영하였다. 그 후 가야누마 탄광주식회사[1930~1939년]를 거쳐 가야누마 탄화 광업 소속이 되었다. 1930년, 경영 주체가 가야누마 탄광 주식회사로 바뀐 후 일본이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당국의 요구에 따라 출탄량이 증가해 1933~1937년에는 월 1만톤을 달성했고, 1940년에는 양질의 제철 원료탄을 산출하는 원료 탄광으로 지정받았다. 1940년 가야누마 탄광은 일본 특수 코크스(coke) 회사를 합병 흡수해 코크스 제조, 판매를 겸영하게 되었다. 1940년 8월 15일, 합병을 통해 가야누마 탄광은 가야누마 탄광업주식회사로 바뀌고 본사를 도쿄로 이전하였다.
가야누마 탄광에서 채탄하는 석탄은 유산[硫酸. 유황분]이 많이 섞여 있지만 코크스 제조용으로서 뛰어난 발열량을 가진 점결탄, 중간 정도의 점결탄 및 가정용탄으로서 좋은 부점결탄 등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 사갱(斜坑)으로 탄층 상태는 대체적으로 양호하고, 각 탄층의 모암(母巖), 즉 약암·사암·항암 등은 대체적으로 짜임새가 좋아 갱도에 많은 갱목이 필요 없는 장점을 갖추고 있다. 그 외에 가스가 적고, 용수(用水)가 적은 점, 갱내 천정과 바닥의 짜임새가 좋은 점, 탄층의 수가 많고, 각 층이 두꺼워 채탄이 쉬운 점, 단층 및 습곡이 적은 점 등도 다른 광산에서 볼 수 없는 장점이다. 이로 인해 당시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과 원료 탄산으로 지정되는 우대도 받았고, 석탄 매수 가격이 높아져 수익성도 올라갔다. 그러나 심각한 난굴(乱掘)을 낳았다. 1930년대 중반에는 이미 채굴된 본갱, 호도쿠[宝徳]갱 이외에 주요 갱도로 제2 사갱[1937년], 제3 사갱, 제3 수평(水平)갱[이상 1940년]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곳곳에 갱도를 신설해 난굴한 것은 전후 합리적인 채탄 계획을 진행하는데 큰 장해가 되었다.
가야누마 탄광은 연간 10만 톤을 상회하는 정도의 출탄량을 지닌 소규모 탄광이었으나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정부는 전시 산업으로서 중공업과 화학 공업의 약진을 위해 적극적인 석탄 증산 정책을 펼쳤다. 정부의 석탄 증산 장려와 석탄 수용 증가에 응답하기 위해 가야누마 탄광에서도 1937년부터 45만 톤 증산 계획이 시작되었고, 이후 비약적으로 증산하였다. 증산을 위해 광부 증원을 계획해 광원 주택 40호를 증축하고 인접 광구 300만 평을 매수하여 그 외 250만 평의 시굴 광구를 설정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가야누마 탄전의 전부를 광구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가야누마 탄광의 출탄량은 1937년 이후 감소하였으나, 1938~1944년 동안에 100,000~130,000톤을 기록하였다.
회사 측은 1935년 이후에는 일정한 탄광 주택을 건설함과 동시에 회사의 직할료(直轄寮), 함바[飯場], 다코베야, 조선인 노동자 료[寮. 기숙사) 등을 건설해 가야누마 탄광 지구를 구성하였다. 함바는 광원을 모집해서 탄광에서 기숙 생활을 관리했는데, 나루시마구미[成島組]와 스가와라구미[菅原組]가 운영한 료(鶴谷寮, 至誠寮 등)가 있었고, 회사료[愛国寮, 民生寮] 등이 있었다.
가야누마 탄광은 회사 노무 관리가 엄격했다. 노무계와 탄광 청년단이 탄부의 출석율 향상을 관리했고, ‘감옥방(監獄部屋)’으로 불리는 ‘다코베야’도 운영하였다.
가야누마 탄광이 펴낸 『개광백년사』를 통해 가야누마 탄광의 노동자 수를 살펴보면, 1936년 12월말 갱내부 재적 수는 202명이고, 1937년 3월말 갱내부 재적 수는 217명이었다. 1937년 5월경에는 노동력 부족으로 출탄이 감소하자 회사 측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키타[秋田] 방면과 조선에서 인력을 모집하기로 했다.
일본 탄광업계는 1942년 이후 자재 부족, 광부 충족 사정의 악화, 특이한 노동력 구조, 식량난, 출탄량 감소 경향을 보였다. 일본 정부는 1943년 3월 18일에 ‘전시행정직권특례’를 칙령으로 공포하여 철강, 석탄, 경금속, 선박, 항공기를 5대 중점 산업으로 규정하고 증산에 힘썼다. 1941년 12월에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 전후부터 계속되는 소집 영장으로 감산(減産) 경향이 강해졌다. 가야누마 탄광도 대기업 탄산의 급속한 합리화로 인한 노무자 차출로 433명이던 갱내 직원이 273명으로 줄어 경영 위기 현상을 나타냈지만 정부 지원으로 조선인 노무자를 대량 획득하여 증산 유지를 계속하였다. 일본 패전 후 석탄업 쇠퇴에 따라 가야누마 탄광도 1964년 폐산하였다.
가야누마 탄광에는 1929년부터 조선인이 일하기 시작했다. 1929년 285명의 조선인을 시작으로 증가해 1938년에는 793명에 이르렀고, 1939년부터는 전시 이입 노무자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강제 동원이 시작되었다. 조선인은 1944년에는 천여 명에 달했고, 1945년 해방 당시 538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1939년부터 동원된 조선인은 1943년 6월에는 640명으로, 일본인(509명) 수보다 많았다. 그리고 일본이 패전에 임박한 전쟁 말기인 1944~1945년에는 갱내원의 약 4분의 3을 조선인이 점유하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소라치[空知] 지방에 본사를 둔 가와구치구미[川口組]에 소속된 노무자들은 1939년경 이후 항상 70~80명을 유지했는데, 조선인들은 봉두(棒頭), 세화역(世話役)의 감시 아래 새로운 갱도를 뚫는 힘든 노동에 동원하였다. 도마리무라의 시민들은 가야누마 탄광에서 사망한 조선인 유골을 수습해 1976년에 건립된 호린사[法輪寺]에 안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