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九老工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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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老工團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일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구로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금천구 |
시대 | 현대/현대 |
준공 시기/일시 | 1964년~197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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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2000년 12월 |
원어 항목명 | 九老工団 |
1964년부터 한국 정부의 지원 아래 재일 한인의 투자로 조성된 산업공단.
5·16 군사 정변 이후 수립된 박정희 정부는 국가가 주도하는 한국형 개발 동원 체제로 수출형 축적 체제였다. 국가 주도적인 개발 동원 체제는 수출 전략 산업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 산업화 자금에 있어서 외국 자본 의존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 주도적인 경제 개발과 관련해 자금이 필요해 한일 협정을 통해 자금을 부분적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민간 사업을 위한 자본 도입은 대일청구권과 관련짓지 않았고 재일 한인의 투자는 별도였다.
1960년대 재일 한인 사회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계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로 양분되어 있었다. 재일 한인 사회 속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계 재일 한인 상공인들은 국내 투자에 관심을 갖고 별도의 조직적임 움직임을 보였다. 1962년 2월 22일 일본 여러 지방의 상공회, 한경연,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등의 조직이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기로 하고 재일한국인상공인연합회[현 재일한국상공회의소]를 설립, 한국 경제 개발의 각종 사업에 후원자로서 나서게 되었다.
실제로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고 있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자금 일부는 재일 한인 기업가가 있어서 충당이 가능하였다. 국교 정상화 이전인 1963년 1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재일 한인의 재산 유입 명목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재산은 공식 통계만으로도 2,560만 달러였다. 1965년부터 1979년까지 재일 한인이 한국에 투자한 금액은 10억 달러 이상이었다. 초기 투자 자본 가운데는 나일론계가 757만 달러, 기계류가 330만 달러를 차지하였다. 당시 일본은 해외 송금액이 500달러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재일 한인에게는 예외적으로 재산 반출 한도액을 3,000달러, 영주 귀국자에는 1만 달러까지 허가하였다. 1만 달러 이상을 반입한 재일 한인은 21명이며, 총액은 1,136만 3,337달러에 이르렀다.
1966년 7월 한국 수출 산업 공단에 입주가 시작되면서 14개사의 재일 한인 기업이 제1차 입주 기업이 되었다. 구로공단의 재일 한인 1차 입주 기업은 동흥전기제작소[유일용], 한국 마벨[김용태], 대판대섬유[김산풍], 삼화합성공업[오복침], 대판교역[장중균], 대한광학[김상길], 대륙금속[허필석], 평화공업[배찬두], 싸니전기[곽태석], 풍전공업[주공력], 삼화제관[정환무], 심산산업[장봉호], 대경물산[박성진], 광화물산이었다.
구로공단을 통한 재일 한인 국내 기업 활동, 투자는 애국심과 박정희 정부의 정책적 필요가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 재일 한인의 자본은 민족적 성격이 강하였다. 재일 한인이 국내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모습은 1970~1980년대 이후에 나타났으며 다양한 형태의 국내 활동으로 학교 설립, 새마을 운동 지원 활동, 각종 기부, 국가적 행사의 지원 등의 형태로 귀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