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키니쿠 산업

원어 항목명 焼肉産業
한자 燒肉産業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焼肉産業
정의

재일 한인들이 일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작한 대표적 한인 산업.

개설

재일 코리안들이 일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처음 시작한 업종으로, 일본 도축장이나 정육점에서 내다버린 소나 돼지의 내장을 주워 모아 작은 식당을 운영한 것이 야키니쿠 산업의 시초이다.

강제 동원 노동자와 야키니쿠 음식

일본 최초의 한국 요리점은 1905년 이인식이 도쿄 우에노[上野]에 ‘한산루’라는 요리점을 개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제국통계연감』에 따르면 일본에 체류하던 재일 한인은 303명으로 대부분이 한국 정부의 외교관이나 유학생 및 상인이었다. 1910년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에서 많은 재일 한인들이 강제로 징용되어 도쿄나 오사카 주변 대도시, 탄광, 광산, 군수 공업 지대 등의 노동자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집거지인 ‘조선인 부락’이 생겨나게 되었다. ‘조선인 부락’의 형성과 함께 자연히 고향의 맛을 찾는 사람들을 상대로 ‘조선 요리점’이 생겨났다. 당시 조선인 식당은 노동자들이 매일 힘든 노동에 지치고 경제적으로 빈곤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 고객을 위한 식당이라기보다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배고픔을 달래주는 작은 식당 정도였지만 고향의 맛과 허기를 면하기 위해 버려진 소나 돼지의 내장 등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다. 1928년에 발행된 『도쿄음식점』에 따르면 도쿄 내에 서양 요리점이 1,619개, 메밀 국수점이 1,568개, 라면 점포가 444개로 조선 요리나 대만 요리점은 단지 세 개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재일 한인의 수가 급증하면서 재일 한인 집단 거주지 내에서 동포들을 위한 식당은 늘어났다. 해방 전에 이미 조선 식당이 일본 번화가인 아카사카[赤坂]나 우에노[上野]에 등장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재일 한인들이 먹던 음식이 야키니쿠 산업으로 발전한 것은 해방 이후이다.

해방 후 대표적인 재일 한인 산업으로 발전

재일 코리안들이 일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처음 시작한 업종이 야키니쿠 산업이다. 야키니쿠 산업은 소자본으로 장소와 조선 음식에 대한 약간의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간단히 창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일본에서는 극심한 식량난으로 음식 장사는 무엇이든 잘 팔리는 시대였다. 재일 코리안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야키니쿠 식당에 필요한 재료를 수집하였다. 재일한인들이 일본 도축장이나 정육점에서 내다버린 소나 돼지의 내장을 주워 모아 작은 식당을 운영한 것이 야키니쿠 산업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재료는 당시 일본에서 생활 통제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교적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영양가도 높아 인기가 매우 좋았다. 해방 전에는 주로 소나 돼지의 내장을 구워먹는 ‘호르몬 야끼’의 인기가 높았지만 해방 이후 최초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고기를 구워먹는 ‘명월관’이라는 ‘야키니쿠’식당이 신주쿠[新宿]역 서쪽 입구에 개업하였다. 이후 ‘태창원’, ‘천산원’과 같은 야키니쿠 식당이 가족 경영에서 종업원을 고용한 전문 식당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탄생 배경 때문에 당시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야키니쿠 식당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이후 동쪽에는 ‘명월관’, 서쪽에는 ‘식도원’ 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두 식당은 5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재일 한인의 대표적인 야키니쿠 식당으로 성장하였다.

차별 심한 일본 사회에서 민족 산업으로 상징

야키니쿠 산업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 요리점으로 불렀으나 국적 문제와 얽히면서 점차 남북의 정치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야키니쿠 식당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그 후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와 1980년대 후반 뉴커머의 증가에 힘입어 한국 가정 요리점이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들 식당의 공통 메뉴로는 갈비, 곰탕, 냉면, 지지미, 김치, 감자탕, 잡채, 각종 찌개류 등이었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일본에서는 한국의 역사, 문화, 요리, 음악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1998년 일본 대중 문화 개방과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 2003년에는 「겨울연가」에 의한 ‘한류’ 붐으로 한국 요리에 대한 붐이 일어났다. 야키니쿠 산업이 발전한 것은 해방 후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 재일 한인 1세들의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민족 차별과 취직 차별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야키니쿠 산업을 민족 산업으로 발전시킨 것은 재일 한인 1세와 사업의 계승자, 신산업의 개척자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현재 야키니쿠 산업은 재일 한인 1세의 고령화와 세대 교체로 인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일본 경제의 거품 붕괴, 가격 파괴, 소고기 수입자유화, O-157, 광우병, 대기업 참여, 일본 내 배외주의 등의 영향으로 경영 환경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문헌
  • 『일본 한인의 역사』상(국사편찬위원회, 2009)
  • 임영언, 『재일코리안 기업가: 창업방법과 민족네트워크』(한국학술정보, 2006)
  • 『무등일보』(201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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