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朴尙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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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尙東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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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의성군 북안면 쌍계동 |
학교|수학지 |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
활동지 |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
원어 항목명 | 朴尙東 |
성격 | 종교인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를 중심으로 활동한 기독교 목사.
박상동(朴尙東)[1894~1948]은 일본의 오사카와 나고야 지역을 중심으로 기독교 사상에 입각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북안면 쌍계동에서 기독교 목사 박영화(朴永和)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대구 계성학교 재학 시 3·1 운동에 참여하여 6개월 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 후 일본에 유학하여 나고야칼빈교중앙신학교를 졸업한 후 장로교의 목사가 되었다. 1925년 조선에서 목사로 활동하였으나 1930년 일본 오사카에 파견되어 재일 조선인에 대한 포교를 담당하였다. 이때 재일 조선인의 인권 옹호를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으며, 1932년에는 교단의 명을 받아 아이치현으로 임지를 옮겨 나고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재일 조선 기독교 조직이 일본기독교연맹과 합동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합동 조건 중 포교 시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한 것을 삭제시키고 민족 독자의 단체로서 활동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성서의 유대민족 기술을 이용하여 신자에게 조선의 독립과 민족 정신을 고취하였다. 또 조선에서 행해진 강제적 신사 참배를 비판하였으며, 미일 간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은 패전할 것이라 예상하고 조선의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2년 일제의 특고 경찰은 나고야의 조선 그리스도교 관계자와 함께 박상동을 검거하였다. 결국 박상동은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아먀구치의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일제 패망 이후 석방되어 귀국하였으나 1948년 5월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