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崔昌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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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昌華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9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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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37년 |
수학 시기/일시 | 1943년 |
수학 시기/일시 | 1943년 |
수학 시기/일시 | 1944년 |
수학 시기/일시 | 1947년 |
수학 시기/일시 | 1950년 |
수학 시기/일시 | 1964년 |
수학 시기/일시 | 1967년 |
수학 시기/일시 | 1974년 |
몰년 시기/일시 | 1995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남산동 |
원어 항목명 | 崔昌華 |
성격 | 인권운동가 |
성별 | 남 |
1954년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한인 인권 개선 운동을 벌인 재일 한인 1세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
최창화는 1930년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1937년 선천쇼와진죠소학교에 입학하였고, 1943년 선천쇼와고쿠민학교[구 선천쇼와진죠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43년 사립평안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선천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1950년 신흥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4년 야하타[八幡]대학에 입학하였으며, 1974년 후쿠오카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최창화는 1946년 선천동교회 학생회 회장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도·시·군인민위원회의 일요일 선거에 반대하는 운동을 조직하고 선거를 거부함에 따라 보안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출소한 후 월남하였지만 한국 전쟁을 피해 제주도로 건너가 4년을 보낸 후 195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효고현 등에서 교수와 목사로 활동하고 1960년 재일대한기독교 고쿠라교회의 목사로 고쿠라로 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배경에는 일본인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있었지만, 관동 대지진 직후에 일어난 조선인 학살이나 강제 동원 피해자의 유골이 하찮게 취급되는 것을 알고 제국주의적 의식이 내면화되어 온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68년 일어난 김희로 사건에서는 사건이 전국에 보도된 다음 날 현장인 시즈오카현 스마타쿄[寸又峡]로 달려가 김희로를 직접 만나 인질을 풀어 주고 법정에서 사건의 계기가 된 민족 차별 문제를 호소하도록 설득을 시도하였다. 김희로의 형이 확정된 후에도 서신 교환 등을 통해 교류를 계속하였다.
최창화는 전도와 함께 야하타대학, 후쿠오카대학 대학원에서 재일 한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며 다양한 인권 획득 투쟁을 전개하였다. 재일 한인의 강제 국외 퇴거 처분을 둘러싼 재판에 원고의 특별변호인이나 보좌인(補佐人)으로서 관여하고,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인권획득투쟁전국연합회 대표자의 한명으로서 참정권 획득 투쟁이나 지문 날인 거부 투쟁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NHK가 최 씨 성을 일본어 읽기로 보도한 것에 대해 인격권을 존중하고 민족어음의 호칭을 요구하는 재판을 제기하였다. 재판은 패소하였지만 이름의 호칭에 인격권이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고, NHK에서도 1985년 이후 중국과 한국·조선의 지명이나 이름을 민족어음으로 읽도록 바꾸었다.
최창화의 저서로는 1968년 『김희로 사건과 소수민족[金嬉老事件と少数民族]』, 1975년 『국적과 인권[国籍と人権]』, 1979년 『이름과 인권[名前と人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