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蔡用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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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用錫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20년 3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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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1년 |
활동 시기/일시 | 1977년 |
몰년 시기/일시 | 1988년 7월 22일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3년 11월 |
출생지 | 대한민국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미죽리 |
활동지 | 일본 도쿄도 |
원어 항목명 | 蔡用錫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일본 도쿄도에서 활동한 재일 한인 독립운동가.
채용석(蔡用錫)은 1920년 3월 10일 충청남도 천안군 풍세면 미죽리[현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미죽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 일본 도쿄[東京] 시바구[芝區] 다무라정[田村町][지금의 도쿄 미나토구(港區) 니시신바시(西新橋) 일대]의 신문 판매소에서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고아공학원[興亞工學院] 토목과에 입학해 어렵게 공부하였다. 박인석(朴寅錫)·현창석(玄昌碩)·정종락(鄭鍾樂) 등과 자주 모임을 갖고 조선인의 교육 문제, 민족 차별 등과 관련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논하며 동지로서 결속을 강화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때를 기회로 보고 조선 독립을 달성하고자 우리조선독립그룹을 결성하였다. 우리조선독립그룹은 주요 건물 파괴, 식량 창고 방화, 수도 및 도로 파괴 등 일본의 혼란을 가중시키겠다는 목표 하에 각자의 활동 구역을 분담하였다. 채용석은 도쿄 아자부구[麻布]와 시바구 지역을 담당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42년 3월 28일 검거되었다. 1943년 11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해방될 때까지 복역하였다. 채용석은 1988년 7월 2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채용석의 공로를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