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尹基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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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基協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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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3년~1927년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8월 15일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회령군 봉의면 남산동 |
학교|수학지 | 일본 지바현 지바시 주오구 |
원어 항목명 | 尹基協 |
성격 | 노동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활동한 재일 한인 노동 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
윤기협은 1909년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봉의면(鳳儀面) 남산동(南山洞)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윤기협은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3년 관동 대진재(関東大震災) 직후 지바중학교[千葉中学校] 3학년에 편입하여 1927년 봄 졸업하였다. 재학 중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여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학교 측에서 이과(理科) 조수(助手)로 고학(苦学)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니혼대학[日本大学] 전문부(専門部)에 입학하여 잠시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이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労働総同盟) 도쿄조선노동조합[東京朝鮮労働組合],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 계통의 간토목재노동조합[関東木材労働組合], 일본 공산당,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산하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日本土木建築労働組合) 등에서 활동하였다. 윤기협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활동을 할 당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의 전체 조합원 중 30% 이상이 조선인 노동자였는데, 이들 가운데 윤기협이 가장 신망이 두터운 일본 공산당원으로 평가된다.
윤기협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여 도쿄조선노동조합 북부지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해소된 후에는 1930년 1월 김범이(金凡伊)와 함께 김두용(金斗鎔)이 한글로 번역한 「의회해산 선거투쟁 방침서」를 인쇄하여 도쿄조선노동조합 북부지부 및 동부지부의 각 반(班)에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4월 4일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간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는데,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불기소(不起訴)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1월 도쿄시[東京市] 후카가와구[深川区]의 제재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계통의 간토목재노동조합의 중심 활동가로서 도쿄 동부를 거점으로 한 노동 운동을 이끌었다. 그 무렵 일본 공산당에 입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공산당 도쿄시위원회 고토지구[江東地区] 우마야바시[厩橋] 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산하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결성에 관여하였으며, 고토지구 위원이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윤기협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본부 위원으로 활동하던 1932년 8월 이와테현[岩手県] 야하기무라[矢作村]의 철도 공사 현장에서 쟁의가 일어났는데, 당시 일본 측 고용주의 폭력단에 대한 습격에 참여하였다. 이때 일본 공산당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활동가 미야가미[宮上則武][일명 마쓰바라[松原]]와 연관된 스파이로 지목되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서 제명당하였다. 8월 15일 우에노온시공원[上野恩賜公園]에서 일본 공산당 도쿄시위원장 무라카미 다키오[村上多喜雄]에 의해 사살(射殺)되었다[일명 윤기협 사살 사건]. 8월 17일 현행범으로 체포된 무라카미 다키오는 옥중에서 “윤기협은 절대로 스파이는 아니다.”라고 확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