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姜甲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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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甲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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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45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평양부 경창리 |
거주|이주지 | 일본 도쿄도 나카노구 히카와정 |
학교|수학지 | 일본 도쿄도 후추시 |
원어 항목명 | 姜甲德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말 일본 도쿄도에서 조선인 비밀 결사 운동을 주도한 활동가.
강갑덕은 1915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후반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에 입학하였다. 강갑덕은 도쿄외국어학교 내 비밀 그룹인 유물론연구회(唯物論硏究會)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2학년이던 1939년 1월 18일 일본 경시청(警視廳)에 검거되었다. 6월 21일 검찰로 송치되어 10월 14일 기소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풀려난 후에도 강갑덕은 1940년 말경부터 동지 김광지(金廣志)[삼성당(三省堂) 점원]와 함께 계속 활동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재학 당시의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여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로 하고, 상호간의 의식 고양, 공산주의이론 연구, 동지 획득 등에 대해 종종 협의하였다.
1943년 10월경에 이르러 이들은 각자 규합한 개별 소그룹들을 통합하기로 하였다. 강갑덕은 마에가와 지로[前川二郞], 사토 노보루[佐藤昇], 야마다 아쓰시[山田敦] 등을 동지로 규합해 소그룹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김광지 역시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여 소그룹을 결성하고 있었다. 광범위한 도쿄외국어학교 관계자를 망라하여 대동단결(大同團結)로 조직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기로 결정하고, 각 그룹 멤버들을 합동하여 보다 강화된 결사인 13인회로 통합하였다. 11월경부터 13인회의 구성원들은 수십 차례 비밀 회합을 가지면서, 서로 당면한 시국(時局)에 대해 토의하고 의식의 고양을 도모하는 한편 조직의 확대 강화에 노력하였다.
13인회 회원들이 논의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첫째 전쟁이 공산주의 운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번 세계 대전은 자본주의 모순에서 비롯된 당연한 귀결로서 장차 자본주의 사회 붕괴의 전야(全夜)라고 할 수 있는데, 세계 제국주의 열강은 세계 시장 재분할 등을 강행하여 중간층 몰락과 대자본가의 이윤 추구로 프롤레타리아트와 자본가 계급의 대립이 격화되어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것이며, 둘째 전국(戰局)은 유럽에서 독일은 소련에 무너질 것이고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영·미의 생산력에 대항하기 위해 날로 군수 생산을 강행함으로써 노자대립(勞資對立)이 격화할 것이며 전세(戰勢)가 악화함에 따라 식량 등 경제적 사정으로 국내 정치가 동요하여 결국 패전(敗戰)하게 될 것이며, 셋째 우리의 사명은 일본이 패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이를 것이니 이 호기(好機)의 도래에 대비하여 일반 미조직 대중을 지도하여 공산주의 혁명으로 이행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강갑덕은 1943년 12월 23일 검거되었으며, 동지 5인[일본인 2명 포함]도 비슷한 시기에 검거되었다. 검거 당시 강갑덕은 무직(無職) 상태였다. 강갑덕은 1944년 10월 14일 검찰로 송치되었으며, 이보다 앞서 1944년 3~8월 13인회의 조선인 회원인 김광지, 다카야마 미쓰로[高山光郞][일본무선주식회사 사원], 쓰야마 도시오[津山俊雄][도쿄외국어학교 학생] 등도 이미 송치되어 있었다. 강갑덕은 도쿄구치소[東京拘置所]에 미결구류(未決拘留) 상태에 있던 중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