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철

원어 항목명 朴恩哲
한자 朴恩哲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朴恩哲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일본 공산당에 가입해 재일조선인연맹 등에서 활동한 재일 조선인 지도자.

활동 사항

박은철은 평안도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에서 활동하면서 일본 공산당에 들어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마[多摩]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해방 직후 김두용(金斗鎔) 등과 함께 일본 공산당원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재일조선인연맹[조련] 결성 준비 중인 1945년 9월 정치범석방운동촉진연맹을 조직하고, 조선인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일본인 정치범들의 석방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10월 15~16일 재일조선인연맹 결성 대회에서는 친일파를 배제하고 공산주의자가 주도권을 잡는 조직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45년 12월 재일 조선인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 공산당 내에 조선인부가 설치되자 박은철김천해 부장 밑에서 간토[關東] 지구 담당 부원이 되었다. 1946년 2월 일본 공산당 제5회 대회에서는 중앙 위원 후보 20명 중의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3월 신조선 건설의 초석이 될 조선인 청년 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도쿄에서 3·1정치학원이 창설되자, 박은철은 학원장에 취임하고 매년 200~300명의 공산주의 활동가를 배출하였다. 박은철은 학원 안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며 지냈지만 거의 학생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1947년 12월 일본 공산당 제6회 대회에서도 중앙 위원 후보 10명 중의 한 명으로 뽑혔다.

1949년 9월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재일조선인연맹이 강제 해산된 후, 김천해를 비롯해 재일조선인연맹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의 주요 간부 29명이 공직 추방 처분을 받았으므로 조선인 당원의 활동은 일본 공산당이 직접 지도하는 식의 조직 재편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일본 공산당 조선인부장이자 사실상 재일조선인연맹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던 김천해는 결핵 요양 등의 이유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949년 12월 상순 조선인부에서 김천해를 보좌하였던 박은철의 제안으로 조선인 일본 공산당원이 비공식 당 조직으로 민족대책부[민대]를 설치하였고, 1950년 6월 정식으로 당 중앙의 지하 조직으로 인정받았다. 즉, 재일 조선인의 공산주의 운동은 일본 공산당 아래 민족대책부를 중심으로 전개되게 된 것이다. 1950년 6월 김천해가 북한으로 떠난 후 박은철은 사실상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1951년 1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의 결성 등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5년 재일 조선인 운동의 노선 전환에 따라 민족대책부의 중심 인물로 자기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결성 시기인 1955년 4월을 전후해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참고문헌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吳圭祥, 『ドキュメント在日本朝鮮人連盟: 1945~1949』(岩波書店, 2009)
  • 金太基, 『戰後日本政治と在日朝鮮人問題: SCAPの對在日朝鮮人政策 1945-1952年』(勁草書房, 1997)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