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南浩栄 |
---|---|
한자 | 南浩榮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10년 12월 11일 |
---|---|
수학 시기/일시 | 1928년 |
수학 시기/일시 | 1930년 |
몰년 시기/일시 | 1970년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동 |
학교|수학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학교|수학지 | 일본 도쿄도 |
학교|수학지 |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
원어 항목명 | 南浩栄 |
성격 | 노동운동가|사회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간회 도쿄지회 회원|도쿄의 고메요코세카이 대표|관동소비조합연맹 중앙집행위원|재일본조선인연맹 중앙상임위원|민중영화사 대표|남북통일운동준비위원회 발기인 |
192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 운동에 참여한 재일 사회 운동가이자 민족 운동가.
남호영은 1910년 12월 11일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태어나 1920년대 중반경 일본 도쿄도[東京都]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재일 조선인의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신간회(新幹會) 도쿄지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니혼대학을 중퇴한 후에는 도쿄에서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과 잇따른 농업 공황의 여파로 1932년 고메요코세운동[米よこせ運動]이 일어나자 빈궁한 재일 조선인을 대표하여 고메요코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33년 관동소비조합연맹(關東消費組合聯盟)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일제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이후에는 재일본조선인연맹 중앙상임위원, 민중영화사(民衆映畵社)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55년 이른바 제3의 노선을 지향하는 중립화운동을 추진하여 한민족의 대동단결과 남북 자유 선거 등을 주장하며 남북통일운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남호영은 1928년 1월 신간회 도쿄지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이후 재일 조선인의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1930년 11월 13일 경찰의 고문으로 죽은 관동자유노동조합 성북지구 위원 박철규(朴哲奎)의 고별식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1929년 세계 대공황과 연이은 농업 공황의 여파로 1932년 일본에서 일어난 고메요코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1932년 8월 1일 반전데이(反戰Day)에 도쿄의 고메요코세회[米よこせ會] 대표로 농림성(農林省)에 진정하는 등 쌀 불하운동(拂下運動)에 참가하여, 8월 10일 고메요코세카이 각 지구 연락위원회 개최를 협의하던 중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1933년 관동소비조합연맹(關東消費組合聯盟)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일본소비조합연합 본부의 김태욱(金台郁) 등과 협력하여 조호쿠소비조합[城北消費組合], 쇼난소비조합[湘南消費組合], 다마가와소비조합[多摩川消費組合]을 지도하여 각종 집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한글로 작성한 격문과 뉴스 등을 발행하여 배포하는 활동도 전개하다가 1933년 2월 19일 또다시 검거되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재일본조선인연맹 중앙상임위원, 민중영화사(民衆映畵社) 대표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두고 좌파와 우파, 중도파 등을 망라한 초당파적 입장에서 이른바 제3의 노선을 지향하는 중립화운동을 추진하였다. 1955년 12월 5일 김삼규(金三奎), 박춘금(朴春琴), 권일(權逸), 이북만(李北滿), 원심창(元心昌) 등과 함께 한민족의 대동단결과 남북 자유 선거 등을 주장하며 남북통일운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강령과 선언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