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석

원어 항목명 羅景錫
한자 羅景錫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 8월 14일[음력]
수학 시기/일시 1914년 7월
몰년 시기/일시 1959년 12월 31일
출생지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군 남부면 남수동(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거주|이주지 대한제국 경성부 익선동
거주|이주지 중국 봉천
학교|수학지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학교|수학지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학교|수학지 일본 도쿄도
원어 항목명 羅景錫
성격 사회운동가
성별
본관 나주
대표 경력 재판조선인친목회(在阪朝鮮人親睦會) 총간사|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 이사|봉천동아권업회사(奉天東亞勸業會社) 사원|봉천 민천공사(民天公司) 전무|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노동부 위원|조선전재기술자협회(朝鮮戰災技術者協會) 고문|한국지사영접위원회(韓國志士迎接委員會) 위원|사회당(社會黨) 농림정책위원장
정의

일제 강점기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한 사회 운동가이자 교육자.

개설

나경석은 일제 강점기에 국내와 일본에서 노동자 등 빈민층을 대상으로 한 사회 운동과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교육자로도 활동하였다.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유학 중 조선인 유학생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5년 9월경 귀국하여 회사와 제약 사업 등에 종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즈음 유학 때 친구였던 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축구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 『공제(共濟)』 등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글을 발표하였다. 1918년 6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후 신익희, 윤홍섭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1919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 살인미수,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개월을 언도받았다. 1920년대 초 노령 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가 동아일보사 객원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9월 만주로 건너가서 봉천동아권업회사(奉天東亞勸業會社) 사원, 조선인 농사회사인 민천공사(民天公司) 전무 등으로 1930년대까지 계속 근무하였다. 1945년 8·15 이후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사회당(社會黨) 등에 관여하였다.

가계

나경석의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지방 관료를 지낸 나기정(羅基貞) 이며, 여동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알려진 나혜석(羅蕙錫)이다. 2004년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이라는 책을 출판한 나영균[이화여자대학교 명예 교수]이 장녀이며, 차녀는 나희균이다.

활동 사항

나경석은 1914년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자 구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재판조선인친목회(在阪朝鮮人親睦會)에서 1915년 1월 정태신(鄭泰信)의 후임으로 총간사를 맡아 활동하였다. 1920년 7월 창간된 문학 동인지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동아일보』, 『공제』 등 신문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관여되어 한때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 1920년대 초 노령 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가 동아일보사 객원 기자로 활동하면서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시베리아 동포의 살아갈 길」 등을 연재하였다.

1920년대 초 일본 니가타현[新潟縣] 시나노카와[信濃川]에 있는 신월전력주식회사(信越電力株式會社)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일어난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이 알려지자 1922년 8월 7일 조사 위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돌아와 조사보고회에서 발표하였다.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은 1922년 7월에야 처음으로 외부에 공개되었는데, 당시 국내의 각 단체에서도 연합하여 대응하는 과정에서 대표로 파견된 것이었다. 10월 재외조선인노동상황조사회(在外朝鮮人勞動狀況調査會)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일본 지역 조사를 실시하였다. 1923년 1월 창립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3월 이사회에서 추진하기로 결정된 소비조합(消費組合) 설립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9월 중국 봉천으로 건너가 회사원으로 근무하였다. 1934년 7월 봉천의 재류 한인들과 함께 조선인의 단결과 친목으로 표방하고 공영회(共榮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8·15 직후 1945년 9월 창당된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노동부 위원, 10월 결성된 조선전재기술자협회(朝鮮戰災技術者協會) 고문, 이승만(李承晩)을 비롯한 국외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반들을 맞기 위해 설치된 한국지사영접위원회(韓國志士迎接委員會) 위원, 1948년 12월 조소앙(趙素昻)을 당수로 발족한 사회당(社會黨)의 농림정책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저술 및 작품

나경석의 작품으로는 1980년 출간된 『공민문집(公民文集)』[정우사]이 있다.

참고문헌
  • 『왜정시대인물사료(倭政時代人物史料)』
  • 『한국잡지백년』1~3(현암사, 2004)
  • 나영균, 『일제 시대, 우리 가족은: 어느 가족의 삶을 통해 본 식민지 한국 지식인 사회의 풍경』(황소자리, 2004)
  • 『조선사상가총관(朝鮮思想家總觀)』(삼천리사, 1933)
  • 『동아일보』
  • 『매일신보』
  • 『독립신문』(1948. 12. 1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 『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警務局, 1934)
  • 朴慶植, 『在日朝鮮人運動史: 8.15解放前』(三一書房, 1979)
  • 內田康哉, 「鮮人ノ行動ニ關スル件: 基督靑年會活動ト羅景錫ニ關スル件外11件」(『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在西比利亞11』, 1921. 2. 9)
  • 「鮮匪團正義府募捐狀況ニ關スル件」(『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在滿洲ノ部41』, 朝鮮總督府 警務局, 1925.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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