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영

원어 항목명 金浩永
한자 金浩永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7년경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
원어 항목명 金浩永
성격 노동운동가
성별
정의

1923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계통 단체에서 활동한 재일 조선인 노동 운동가이자 민족 운동 지도자.

개설

김호영은 1907년경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1923년경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이후 도쿄에서 생활하였다. 처음에는 아나키스트 계통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나, 1925년 이후 사회주의 계통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도쿄합동노동조합, 간토신문노동조합, 노동농민당, 전일본무산청년동맹, 일본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재일노총]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간부로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로 해소시키는 활동을 주도하였다. 1934년 11월 민족적 성격의 한글 신문인 『도쿄조선민보[東京朝鮮民報]』를 창간하였는데, 『도쿄조선민보』는 1936년 9월 『도쿄조선신보[東京朝鮮新報]』로 개칭되었다가 김호영이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인 1937년 9월 폐간되었다. 김호영은 1930년, 1932년, 1934년, 1937년 등 여러 차례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그때마다 전향의 취지를 표방하고 기소 유예 등으로 풀려난 후 활동을 계속하는 일을 반복하였다.

언제 귀국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45년 8·15 해방 이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중앙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1950년대까지 활동하였으나 정확한 사망 일시는 확인할 수 없다.

활동 사항

김호영은 1927년경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한 후 중앙위원으로서 정치부장, 쟁의부장 등을 지내면서 몇몇 노동 쟁의를 직접 지도하였다. 특히 사회주의 계통의 일본어 잡지 등에 재일 조선인의 생활 실정을 알리고 내선융화단체(內鮮融和團體)를 비판하는 글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1929년 후반부터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의 방침을 받아들여 「재일조선노총의 당면 문제에 관한 의견서」를 기초하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해소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때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조선노동조합 폭행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위원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으나, 김호영의 주장대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통합된 후 복권되었다.

1930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조선인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2년 반제동맹에 가입하여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식료조합 고토지구[江東地區] 조직지도원이 되었다. 1932년 9월 교통쇄신회(交通刷新會)에 가입하였으며, 1934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산하의 일본항만노조위원회 도쿄지부 책임자가 되어 기관지 『항만노동자(港灣勞動者)』를 발행하였다. 11월 『도쿄조선민보』를 창간하여 재일 조선인의 생활권 확립, 민족 운동의 재흥(再興)을 도모하였다. 1935년 8월 발족한 재도쿄조선상공협회[在東京朝鮮商工協會]의 서기 및 상담역(相談役)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9월 한반도 조선 북부지방 폭풍재해 구제사업 발기인이 되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서울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쟁의부(爭議部)에서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의 발행인으로도 활동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대회에도 참가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후 북한으로 건너가 1948년 8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9년 후인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도 재선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삼천리 기밀실(三千里 機密室) The Korean Black cham-ber」(『삼천리』7-8, 1935. 9)
  • 「동경(東京)에서 활약(活躍)하는 인물(人物)들」(『삼천리』7-11, 1935. 12)
  • 『자유신문』(1945.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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