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曺基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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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基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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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95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제주도 |
원어 항목명 | 曺基亨 |
성격 | 사회운동가 |
성별 | 남 |
1921년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일본에서 민족 통일과 조선장학회 재건 등을 위해 활동한 재일 한인 사회운동가.
조기형은 소학교 졸업 직전 일본인들이 세운 봉안전(奉安殿) 옆에서 소변을 본 불경죄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조기형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일본인 담임 교사의 도움으로 12세 때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호를 타고 혼자 오사카로 건너갔다. 중학교 진학 후 얼마 있지 않아 일본 정부는 창씨개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기형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경찰에 의해 혹독한 고문까지 당하면서 이후 오른쪽 팔에 후유증까지 남았다. 1944년 이세진구[伊勢神宮] 참배에 반대하며 한때 우베[宇部] 탄광과 만주 등지로 피신하였다. 일본으로 돌아와 검정고시로 오사카상과대학[현 오사카시립대학]에 진학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한신 교육투쟁 시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조기형은 조국의 분단으로 인해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나누어진 재일 한인 사회에서 남북 중립을 철저히 지키며 재일한국인학생학우회[현 고려동창회]를 결성하였다.
조기형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속에서도 민족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조선장학회의 재건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행정 관청에 민족 차별 철폐 민족 학교 설치를 요구하며 앰네스티 간사이그룹과 재일한국인민주간담회를 결성하여 한국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였다. 부인 정말암(鄭末岩)이 경영하는 사회 복지 법인의 이사직도 역임하였다. 조기형은 평생을 민족의 통일과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며,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화해와 우호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재일 한인 2·3세 육성을 위해 힘썼다.
편견이 없었던 조기형을 기리며 사후인 1996년 『가교의 사람·조기형[架橋の人·曹基亨]』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