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丁岩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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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岩右 |
영문 | Jeong Am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오사카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 1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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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9월 30일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양군 골약면 성황리 |
활동지 | 일본 오사카부 |
원어 항목명 | 丁岩右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재일 독립운동가 |
1930년대 일본 오사카 지역에서 민족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정암우(丁岩右)[1899~1950]가 일본에 건너간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1930년 초에 일본 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서 활동한 기록으로 보아 1920년대 중반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명은 무라이[村井]다.
정암우는 1899년 1월 8일 전라남도 광양군 골약면 성황리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대 초 오사카에서 일본 노동조합전국협의회 산하 토목건축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당시 토목건축노동조합은 다수의 재일 조선인들이 가입하여 활동한 강력한 조직이었다. 일본 노동조합전국협의회가 지역 단위 조직으로 오사카 지부를 조직할 때 이성국, 강상호, 이상길, 구재봉, 현호진, 이병화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1934년 3월부터 한동안 와해된 오사카 지부의 재건을 목표로 직업소개소 노동자들에게 격문을 살포하였으며, 박애회의 구성원이던 박수봉과 최봉식 등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같은 해 11월에는 일본 공산당 간사이 지방위원회에 가입하였다. 12월에는 오사카에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간사이 지방협의회 재건준비위원회가 결성될 때 정암우는 홍원표와 함께 참여하였으며, 토목건축노동조합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5년 1월에 「일본 노동조합전국협의회 간사이 지방 재건위원회의 당면 임무」라는 제목의 문서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3월 1일 박형서 등과 오사카부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나 1936년 3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정암우는 출옥 후 1938년 7월에 남은 동지들과 함께 일본공산주의자단에 합류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 규합을 위해 노력하던 중 다시 검거되었다. 1939년 12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정암우는 1942년 6월에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전향하지 않았다 하여 예방 구금의 대상자가 되어 오사카 형무소에 가수용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1950년 9월 3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암우의 공훈을 기려 2019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