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 다카시

원어 항목명 関貴星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4년
몰년 시기/일시 1986년
출생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순천시
원어 항목명 関貴星
성별
정의

1950년대 후반 실시된 북한 귀국 사업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비판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 활동가.

개설

세키 다카시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귀국 사업 개시 전후인 1957년과 1960년 일조사절단으로 북한을 두 번 방문하여 재일 한인 북송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때 보고 들은 것에 기초하여 1962년 『낙원의 꿈은 깨어지고[樂園の夢破れて]』를 간행하고 1963년 속편 『두 개의 조국[眞っ二つの祖國]』을 저술하여 북한과 귀국 사업에 파문을 던졌다.

가계

세키 다카시는 1914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으며 한글 이름은 오귀성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전인 1951년 세키[關]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일본 국적을 얻고 세키 다카시로 이름을 바꾸었다.

활동 사항

세키 다카시는 전후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県]에서 일본 공산당,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朝連)]의 최고 간부를 역임하고 1962년부터 15년간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재정위원을 역임하였다. 세키 다카시는 북한의 실상에 대해서 “6·25 사변이 김일성의 독재 체재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천리마 운동에 의한 전진의 강행 등 백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평양 ‘호텔’의 4층 창가에서 그 참상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그 ‘호텔’의 바로 뒤쪽의 건축 기초 공사장에서 곡괭이를 들고 흙을 파헤치는 몇 명의 여자들의 복장은 낡은 치마 저고리에 맨발이었다.”고 전하였다. 세키 다카시는 북한의 실태를 직접 본 인간으로서 책임감에 기초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당시 세키 다카시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에서 활동하는 딸과 사위와도 절연하게 되었다. 당시 판단을 후회하는 딸의 입장으로 이후 오문자(吳文字)가 1992년 『아버지, 미안해요』를 『봉선화』3호에 게재하였고, 사위 이진희(李進熙)도 2000년 간행한 자서전 『해협』[청구문화사]에서 “지금 생각하면 장인어른의 판단은 옳았다.”고 자기비판적으로 회고하였다. 세키 다카시는 1986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세키 다카시의 작품으로 1962년 『낙원의 꿈은 깨어지고』, 1963년 『두 개의 조국』이 있다.

참고문헌
  • 『在日コリアン辭典』(明石書店,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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