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許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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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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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8월 |
원어 항목명 | 許執 |
성격 | 연극인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일본과 조선에서 활동한 연극인, 연출가, 평론가.
허집은 니혼대학 예술과에 유학하며 니혼대학 조선인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형상좌에서 연극 활동을 하였다. 일본 당국의 탄압으로 극단은 해체되었으며 허집은 1940년 5월 이후 검거되었다. 해방 후 좌익 예술인이 중심이 된 조선연극동맹(朝鮮演劇同盟)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화삼, 김동원, 이해랑 등과 함께 극단 전선에 참가한 허집은 1945년 3월부터 12월까지 경성에 체재하였던 일본의 대표적인 연극 연출가인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와 공동으로 고골리의 「검찰관」[극단 전선, 1945. 11]을 연출하였다. 이후 「데드·앤드(Dead End)」[무대예술연구회, 1946. 11], 「큰집」[무대예술연구회, 1947. 7], 『인형의 집』[번역, 조선공업문화사출판부, 1949. 10], 「높은 암산(岩山)」[극예술협회, 1950. 3] 등의 연출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연세대학교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1950년 8월 북한으로 월북하였다.
허집은 연극 연출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연극 작품을 연출하였으며 연극 평론, 번역 작품을 남겼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검찰관」, 「데드·앤드」, 「큰집」, 「높은 암산」 등의 연극을 연출하였다. 번역으로는 『인형의 집』이 있다. 평론으로는 「소극장운동」[『현대일보』,1946. 8. 30], 「연극 운동의 편견」[『경향신문』, 1946. 12. 24], 「무대 예술과 생활 문화」[『한성일보』, 1947. 2. 1], 「자각과 신념-소극장 운동을 위하여」[『조선중앙일보』,1948. 1. 4], 「연극의 당면문제」[『민성(民聲)』, 1948. 4], 「전후 미국의 연극 동향」[『민성』, 1948. 6], 「전후 소련의 연극 동향」[『민성』, 1948. 7·8], 「내일의 극장을 위하여」[『민성』, 1949. 2] 등의 작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