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辛載鎔 |
---|---|
한자 | 辛載鎔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오사카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추정] |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북도 부안군 |
원어 항목명 | 辛載鎔 |
성격 | 노동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위원 |
일제 강점기 일본 오사카 지역에서 활동한 재일 조선인 노동 운동가.
신재용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설립 초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한 활동가로, 주로 오사카에서 활동하였다.
신재용은 1925년 7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간사이연합회[在日朝鮮労総關西聯合會] 설립 당시에는 조토노동동맹회[城東労総同盟會]를 대표하여,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1926년 4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제2회 정기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일본인 좌익 단체와 연계를 주장한 김달환(金達桓)과 함께 간사이연합회의 다른 간부들과 대립하였으나 이후 화해하였다. 1927년 제3회 정기 대회에서도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간사이연합회 위원장, 오사카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투쟁을 지도하였는지는 불분명하나 1926년 미에현[三重県] 기노모토정[木本町]에서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노동자 학대 사건 발생 당시 선두에 서서 항의하였다. 노동 운동은 물론 조선인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일월회에도 가맹하였다. 1927년 결성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자의 통일 전선적 운동 단체인 신간회 오사카지회에도 참가하였고, 이후 간부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928년 무렵 조선 공산당의 한 분파인 춘경원공산당[春景園共産党]으로 불리는 사건에 연좌되어 검거 후 기소되었다. 용의는 조선 공산주의자인 허일[許一]의 명을 받아 오사카지부를 설립하였다는 것으로 1929년 4월 신의주 지방 법원 공판에서 용의 사실을 부인하였다. 12월 판결에서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받았으나 신의주 형무소를 탈옥하였다.
1930년 오사카로 건너가 오사카 기시와다[岸和田]방적공장 조선인 여공들의 쟁의를 지원하였다. 오사카조선무산자진료소[大阪朝鮮無産者診療所] 운영에도 관여하였고, 1931년 6월 오사카조선무산자진료소 유지를 위해 기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