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崔学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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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學柱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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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 |
원어 항목명 | 崔学柱 |
성격 | 아나키스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동흥노동동맹 대표 |
일제 강점기 일본 도쿄에서 활동한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
최학주(崔學柱)[1906~?]는 1906년 경상남도 통영읍에서 태어났다. 도쿄[東京]에 거주하는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이 만든 아나키스트 계열 노동 단체인 조선 동흥노동동맹의 간부였다. 1932년 8월 집세 체납으로 동맹사무소를 비워 줘야 하는 재정적 위기에 봉착했지만 사태 타개를 위해 10월경 조선 동흥노동동맹의 대표가 되었다. 이후 조성금 마련을 위해 힘을 쏟았으며, 1932년 11월 6일에는 현재의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區] 북동부 지역인 도쿄 간다구[神田區]에 사무소를 새로 개설하였다. 사무소 이전으로 일시 휴간한 기관지 『흑색신문』을 다시 발행하면서 편집을 맡았다.
이듬해 1933년 4월 5일 간다에서 한일 아나키즘 단체에 의한 메이데이 투쟁준비협의회가 개최되었을 때 동흥노동동맹 대표로서 출석하였다. 그리고 메이데이 당일에는 동맹원들과 함께 좌파 행렬에 참가하여 ‘파쇼 반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실업 반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행진하였다. 1934년 3월 23일 아나키즘 계열의 신문 잡지사 대표 등에 의해 개최된 출판활동협의회에 『흑색신문』 대표로 출석해 타 대표들과 함께 해방문화연맹의 전국적 조직에 관해 협의했다. 1936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불기소되었다. 1937년 전향하여 국방헌금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