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식

원어 항목명 李春植
한자 李春植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오사카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원어 항목명 李春植
성별
정의

1923년 일본 오사카부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 권익 옹호 운동을 하다가 변절한 친일 인물.

개설

이춘식은 1899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서 태어나 1923년 이선홍을 따라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조선인협회(朝鮮人協會) 니시노다지부장[西野田支部長]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선홍(李善洪)이 친일 협력의 길을 걷자 이에 반대하여 아나키즘 단체인 조선인 신진회(朝鮮人新進會)를 결성하였다. 하지만 조선인 신진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차가(借家) 협박 사건에 휘말려 일제 경찰에 검거된 후 융화주의자로 전환하였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도 오사카 지역에서 협화 운동에 앞장서는 등 일제 협력의 길을 걸었다.

활동 사항

이춘식은 1923년 이선홍을 따라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조선인협회 산하의 니시노다지부장이 되어 실업자 문제, 무료 숙박 등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이선홍이 친일 협력의 길을 더욱 노골화하여 1926년 1월 3일 오사카에 친일 단체를 결성하려 하자, 아나키스트 김태엽(金泰燁) 등과 함께 소동을 일으켜 결성 대회를 중단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이춘식이선홍과 결별하고 김태엽, 고순흠(高順欽) 등과 함께 명실상부하게 투쟁적으로 민족을 위하고 참된 이익을 목적으로 한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월 16일 고노하나구[此花區] 교구락부[曉具樂部]에서 조선인 신진회를 결성하였다. 신진회는 기관지로 『자아성(自我聲)』을 발간하고 오사카 지역 조선인의 주거권(住居權) 확보와 해고 방지, 직업 소개 등 생존권과 관련된 여러 현안들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가, 7월 일제 당국으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았다.

6월경 이춘식신진회 회장으로서 차가 분쟁에 개입하여 입퇴료(入退料) 등에서 사기를 치고 협박한 사실이 드러나, 11월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재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석방된 후 이춘식은 일제에 협력하는 융화주의자로 변신하였다. 1929년 9월 결성된 내선협친회(內鮮協親會)[이후 내선협회로 전환] 북지부장에 취임하였다. 1933년 일본인 독지가가 철도 건설 때문에 살던 집에서 쫓겨난 500명의 조선인을 위해 마련한 내선협회(內鮮協會) 공동주택의 지도자가 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텐만교풍회[天滿矯風會] 간사, 지도원으로서 위생 개선, 가미다나[神棚, 제단] 설치 등의 동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앞장섰다. 1939년 5월 17일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오사카로 시찰을 왔을 때 당시 오사카부 공회당에서 개최된 협화회 오사카지방 간친회에 참석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는 미나미 지로의 연설에 대한 답사를 하였다. 8월 조선인 37,000명을 모아 전오사카 반도인 반영대회[全大阪半島人反英大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1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후 한때 오사카협화협력회[大阪協和協力會] 부회장을 맡는 등 일제의 협화 정책 추진에 앞장섰다. 1942년 일제 당국이 1944년부터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할 것을 발표하자 오사카협화협력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매일신보(每日新報)』에 환영의 뜻을 밝혔으며, 1943년 2월 매일신보사 주최 간담회에 출석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 재일본한국인민족운동자료집』별집3(독립유공자사업기금 운용위원회, 1978)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매일신보』(1939. 5. 18)
  • 塚﨑昌之, 「アジア太平洋戦争下の大阪府協和会·協和協力会·興生会の活動と朝鮮人: 戦時動員体制への「親日派」朝鮮人の対応を中心として」(『東アジア研究』54, 大阪経済法科大学 アジア研究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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