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李仁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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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仁夏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
시대 | 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9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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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52년 |
몰년 시기/일시 | 2008년 6월 30일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구미시 |
학교|수학지 | 일본 도쿄도 미타카시 오자와 3-10-30 |
학교|수학지 | 캐나다 |
원어 항목명 | 李仁夏 |
성격 | 종교인|인권운동가 |
성별 | 남 |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목사 안수를 받고 재일 한인 인권 운동에 앞장선 재일 한인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
이인하는 1925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나 15세가 되던 1941년 혼자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캐나다 유학을 다녀온 후 1959년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와사키시[川崎市]의 한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재일대한기독교회총회,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기독교협의회 의장 등 교회 관계 요직을 역임하였다. 1970년 재일 한국인 2세가 일본 국적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취업을 취소당한 히타치[日立] 취업 차별 사건을 시작으로 재일 한인의 취업 차별 반대 운동을 벌였고, 1980년대에는 일본 내 외국인 지문 날인 철폐 운동에 앞장섰으며, 1990년대에는 재일 한인과 북한인에 대한 전후 보상 운동을 이끄는 등 평생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이인하는 1971년 히타치 취직 차별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박군을 둘러싼 모임의 호소인이 되어 히타치 규탄 투쟁을 지원하였다. 이후 민족 차별과 싸우는 사상을 성서(聖書)에서 찾아 내어 민족차별과 투쟁하는 연락협의회[민투련(民鬪連)]의 대표로 지역에 기반을 둔 민족 차별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반차별국제운동의 이사로서 인권 운동의 국제 연대를 호소하는 한편, 재일 한인과 일본 어린이들이 함께 공부하는 시설인 사회복지법인 세이큐사[靑丘社]를 가와사키시에 설립하였다.
1990년대 초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에 의해 군인(軍人), 군속(軍屬) 등으로 강제 동원되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재일 한인과 북한인에 대한 보상 촉구 운동을 벌인 재일한인전후보상요구회(在日韓人戰後補償要求會)의 공동 대표를 맡아 릴레이 가두 시위를 전개하고 일본 원호법(援護法)의 국적 조항 철폐 요구를 주장하는 등의 운동을 이끌었다. 전후 50주년이 된 1995년 4월 12일 재일동포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모임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하여 기자 회견을 갖고, 한국 정부가 외교상의 노력을 통해 일제하 전쟁 피해자인 재일 한인들의 보상 문제를 즉각 해결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앞서 4월 11일 외무부와 청와대, 국회를 방문하여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또한 1997년 외국인 시민의 목소리를 시정에 반영하기 위해 일본 가와사키시에서 설치한 외국인시민대표자회의의 위원장을 맡아 외국인에 대한 전세 차별 금지를 조례로 제정해 줄 것 등을 시 당국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2008년 6월 30일 도쿄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인하의 작품으로는 1979년 『기류민의 외침[寄留の民の叫び]』, 1987년 『내일을 사는 기류민[明日に生きる寄留の民]』, 1991년 『자신을 사랑하도록: 생활 터전에서 멋지게 시작하다[自分を愛するように : 「生活の座」から, 見言に聞く]』, 1995년 『전후 50년 일본의 국가를 묻는다: 재일·반세기를 살아온 한국인 기독교도의 입장에서[戦後五十年の日本の国家を問う : 在日·半世紀を生きた韓国人キリスト者の立場から]』, 2006년 『역사의 틈바구니에서[歴史の狭間を生きる]』 등이 있다.
아사히 사회복지상, KBS 해외동포상 등을 수상하였고, 2008년 6월 30일 이인하 사망 후 일반인이 참석하는 고별식이 7월 12일 도쿄 신주쿠의 재일대한기독교회 도쿄교회에서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