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李允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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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允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4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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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50년 6월 15일 |
추모 시기/일시 | 2015년 |
학교|수학지 |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
원어 항목명 | 李允熙 |
성격 | 노동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활동한 아나키즘 계통의 재일 조선인 이론가 겸 노동 운동가.
이윤희는 1920년대 초반 대전과 서울에서 아나키즘 계통의 농민 운동과 사회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도쿄 등지에서 아나키즘 운동을 벌였다. 1930년대 초반 오사카에서 교화운동사(敎化運動社), 흑색선인사(黑色鮮人社), 아나키스트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오사카·흑기[大阪·黑旗]』 등의 발행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가족 모두 도쿄로 이주하여 농청사 계열, 자유사(自由社) 계열에 참가하였으며, 조선 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 조선 자유노동자조합(朝鮮自由勞動者組合) 등 민족적 성격을 띤 아나키즘 노동 단체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한때 일제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1934년 1월 조선일반노동자조합(朝鮮一般勞動者組合)을 조직하였다. 1945년 8·15 이후 귀국하여 대전에서 독립노동당(獨立勞動黨)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윤희는 1921년 대전공립상공학교(大田公立商工學校)에 재학 중 동맹 휴학에 참여하였다가 5월 퇴학을 당한 후 대전 일대의 농민 조직 사업과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2월 서울에서 이강하(李康夏) 등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흑로회(黑勞會)를 조직하였다. 흑로회는 도쿄[東京]에서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해 활동하던 박열(朴烈)이 일시 귀국하였을 때 조직되었는데, 이윤희는 당시 박열이 주재하던 잡지 『현사회(現社會)』의 동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윤희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0년경 오사카[大阪]에서 교화운동사, 흑색선인사를 창립하였으며, 2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단체들을 해소하고 아나키스트청년동맹에 참가하였다. 1931년 8월 아나키스트청년동맹이 해산된 후에는 1932년 1월 히라이 데이지[平井貞二] 등과 함께 농청사(農靑社)의 이념에 기초하여 기관지 『오사카·흑기』를 발행하였다. 7월 오사카의 문명비평사(文明批評社)에서 발행한 무정부주의 연구 팸플릿 「무정부코뮌(無政府コンミユン)」에도 참가하였다. 이후 가족과 함께 모두 도쿄로 이주하여 농청사 계열, 자유사 계열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도시의 해체와 농공합체(農工合體)의 코뮌 수립을 목표로 도시 노동자와 시민층을 대상으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9월 농촌청년사가 발전적으로 해체될 때에는 성명문의 초고 기안에 참여하였다.
조선 동흥노동동맹, 조선 자유노동자조합 등 민족적 성격을 띤 아나키즘 노동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7월 일본인 단체와 연합하여 시바우라노동자자유연합[芝浦勞動者自由聯合]을 조직하였다. 『자유연합신문(自由聯合新聞)』의 호외 발행을 협의하다가 한때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으며, 10월 흑색전선사(黑色戰線社) 기관지 배포망을 탐색하다가 검거되었다. 1933년 3월 활동이 침체된 조선 자유노동자조합의 활성화를 위해 개최된 임시 대회에서 문화부에 참여하였으며, 4월 개최된 제3회 전국 대회에서 서기로 선출되었다. 6월 아나키즘 계통 단체들의 통일을 목표로 자유노동자조합이라는 명칭을 자유노동자협의회로 개칭할 것을 제창하였으나 기각되었다. 8월 16일자에 『민중의 종』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오우영(吳宇泳) 등과 함께 조선 동흥노동동맹과의 통합을 추진하여 1934년 1월 21일 조선일반노동자조합을 조직하였다. 조선일반노동자조합은 1935년 1월경 해체되었다. 1945년 8·15 이후 귀국하여 대전에서 독립노동당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6월 15일 사망하였다.
아나키즘 계통의 문예 사상지인 『흑색전선(黑色戰線)』에 이네스톨[이네스토르]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2852번」[1931년 9월 창간호], 「에스페란토에서의 번역[エスペラントからの飜譯]」 등을 기고하였다. 또한 『민중의 종[民衆の鐘]』 등 각종 팸플릿도 작성 배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윤희의 공적을 기리어 2015년 건국 포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