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수

원어 항목명 李雲洙
한자 李雲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8월 27일
몰년 시기/일시 1938년 10월
추모 시기/일시 2006년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북청군 평산면 서원리
학교|수학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원어 항목명 李雲洙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 재일 조선인 항일 독립운동가.

개설

이운수는 1925년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노동 운동과 신사상 운동에 관심이 많아 니혼대학 사회과에서 공부하였다. 재도쿄조선노동조합[在東京朝鮮勞動組合]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8년 집행위원장이 되어 재일 조선인의 노동 운동과 민족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고려 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일본부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8월 29일 경술국치일에 맞춰 선전물을 배포하고 대규모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1935년 출옥한 후에는 민족적 계몽지 발간을 위해 조선신문사(朝鮮新聞社)를 만들고 사장 및 편집발행인으로 일하였다. 하지만 1936년 7월 일제 당국에 또 다시 검거, 기소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38년 3월 석방되었으나 결국 10월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926년 재도쿄조선노동조합이 창립될 때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6월 도쿄에서 적위노동동맹에도 가입하였다. 1928년 4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도쿄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장에 선출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6월 고려 공산청년회 일본부에 가입하여 혼조[本所]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활동하면서 8월 29일 경술국치일을 앞두고 동료들과 함께 대대적인 항일 운동을 준비하였다. 8월 26일 “국치기념일(國恥記念日)에 맞춰 전 조선 2,300만 동포는 일제히 무장(武裝)해서 일대 폭동을 궐기하라!”라는 내용의 선전물을 배포하였다. 8월 29일 150여 명의 조선인과 함께 도쿄시[東京市] 요쓰야구[四谷區] 신주쿠[新宿]에 있는 무사시야백화점[武藏屋百貨店] 앞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 운동을 벌였다. 시위 운동으로 인해 35명의 동료와 함께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30년 11월 도쿄지방재판소[東京地方裁判所]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이에 불복하여 1932년 4월 2일 공소를 제기하고, 1933년 9월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1935년 2월 출옥한 이운수김천해(金天海) 등 동지들과 함께 12월 도쿄에서 민족적 계몽지 발간을 위해 조선신문사를 설립하고 사장 겸 편집발행인으로 취임하였다. 『조선신문(朝鮮新聞)』은 재일 조선인의 문화 향상과 사회적·민족적·계급적 자각을 고취시킬 것을 목표로 출판된 신문으로, 도쿄에 11개, 여타 지역에 10개의 지국을 두고 3,900부가 발간 배포되었다. 이운수박태을(朴台乙)과 함께 게이힌[京浜] 지방을 담당하여 조선인 융화 친목 단체나 유학생 단체 등을 돌면서 독자 확대에 노력하였다. 『조선신문』이 7호까지 간행되던 중 일제 당국은 1936년 7월 31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또다시 이운수를 검거하였다. 1937년 7월 기소 처분을 받았으며, 1938년 3월 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옥중에서의 심한 고문으로 인해 10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운수의 사망 후 동지들은 이운수의 죽음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거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운수의 공적을 기리어 2006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 재일본한국인민족운동자료집』별집3(독립유공자사업기금 운용위원회, 1978)
  • 『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 朴慶植, 『在日朝鮮人運動史: 8.15解放前』(三一書房, 1979)
  • 『近代日本社會運動史人物大事典』3~4(日外アソシエ−ツ, 1997)
  • 「豫審終結決定書」(東京地方裁判所, 193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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