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白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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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武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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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
원어 항목명 | 白武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조선인 노동 운동을 벌이고 해방 이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서 활동한 재일 한인 민족 활동가.
백무는 1919년 고향인 대구에서 3·1 운동에 참가하여 탄압을 받아 1개월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곧장 일본 도쿄도로 건너갔다. 도쿄에서는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읽고, 일본인 사회주의자인 다카쓰 마사미치[高津正道],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등과 접촉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참획(參劃)하였다. 1920년 박열 등과 함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를 결성하고 1921년 사상단체인 흑도회(黑濤會)의 일원이 되었다. 1922년 도쿄 시바우라[芝浦]에서 개최된 메이데이 참가하여 일본인 노동자 앞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대표하여 인사하고 조일 노동자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또한 1922년 발생한 니가타현[新潟縣] 시나노가와[信濃川] 수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조사 활동을 하여, 조선인 학살을 비판하는 연설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영향으로 1922년 도쿄 조선노동동맹회[東京朝鮮勞動同盟會]가 조직되자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1922년 발족되어 있던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일원으로 활동을 지속하여, 1923년 8월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나 김약수(金若水) 등과 함께 부산, 김해, 대구, 서울, 광주, 전주 등을 순회하며 연설회를 하였다. 관동 대지진(關東大震災) 때는 조선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이후 도쿄에 돌아와서 조선인 학살, 박해 조사와 항의, 추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북성회를 계승하여 도쿄에서 일월회(一月會)가 발족되자 일월회에 참여하였다.
도쿄조선무산청년동맹회[東京朝鮮無産靑年同盟會]에도 참가하여, 재일 한인 공산주의 운동, 노동 운동을 지도하였다. 이후 활동의 전면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지만 해방 후에는 재일본조선인연맹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47년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한반도 38도선 이남에서 좌우 합작이 진행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남북 단독 정권 수립에 반대함과 동시에, 재일 한인 운동에서도 계급 투쟁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이익에 중점을 둔 이데올로기를 넘은 폭넓은 조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등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던 인사들이 포함된 좌파 주도의 재일본조선인연맹 내부에서는 백무를 고립시켰고, 1948년 서기장인 백무를 파면하였다.
이후 백무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 참가하여 1950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부의장, 1951년부터 1952년까지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사무총장·조직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요직으로부터 떠난 이후 경영하는 시로타 의원[白田醫院]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산하의 조선인상공협동조합에 가맹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