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규

원어 항목명 金三奎
한자 金三奎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8년
수학 시기/일시 1916년
수학 시기/일시 1921년
수학 시기/일시 1922년
수학 시기/일시 1928년
수학 시기/일시 1931년
몰년 시기/일시 1989년
출생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
원어 항목명 金三奎
성별
정의

1921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출생하여 광복 이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언론인.

활동 사항

김삼규는 1908년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에서 태어났다. 1916년 영암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년 뒤 11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참가하였다.

1921년 일본 도쿄 유학길에 올라 가이조 중학[海城中学]에 입학하였고, 1922년 7년제 도쿄고등학교 심상과(尋常科)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도쿄에서 관동 대지진을 경험한 김삼규는 1928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독문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무산자사(無産者社)의 동인이 되어 활동하였고, 1930년 무산자사 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김삼규는 유치(留置)와 체포를 몇 차례 경험하게 된다. 1936년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 사건으로 체포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조선예술좌 사건으로 김삼규는 1년간 유치되었다가 1937년 8월 석방되었다. 석방 후 도쿄에서 헌책방을 운영하였다.

1940년 가족들과 함께 전라남도 목포로 거처를 옮겨 친형이 운영하는 광산의 경영을 돕기로 하였다. 2년 후 강원도 원주로 이사하여 축산가공업을 하는 등 이 시기 김삼규는 다양한 일에 종사하였다. 광복 후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1947년 서울대학교 문학부 준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48년 동아일보사에 편집국장으로 복귀하여 주필로서 활동하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 종군기자로 동행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사 재직 중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기사를 쓰는 등의 활동을 펼쳤던 김삼규는 1951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김삼규는 중립화통일론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김삼규는 1953년 11월 동아일보사를 퇴사하고, 중립화통일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중앙공론(中央公論)』 등의 잡지에 기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1957년 조선중립화운동위원회를 설립하고 10월 『코리아평론(コリア評論)』을 창간하였다. 1960년 6월 잠시 귀국하여 신문, 잡지, 연설 등을 통해 중립화통일론을 주장하였다. 김삼규는 한국을 종종 방문하며 일본에서 언론인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코리아평론』 등의 잡지를 통해 한반도 정세에 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통일과 중립화통일론에 대한 자신의 분석과 의견을 적극 기고하였고 1973년 8월 교토에 다수의 국제정치학자를 초빙하여 국제심포지엄 등의 행사도 개최하였다. 1980년부터 건강 악화로 인해 수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김삼규는 1989년 후쿠이현[福井県]을 여행하던 중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시립쓰루가병원[私立敦賀病院]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삼규의 저서로는 1956년 『오늘의 조선[今日の朝鮮]』, 1960년 『조선의 진실[朝鮮の真実]』, 1963년 『조선현대사(朝鮮現代史)』 등이 있고, 『코리아평론』에도 다수 기고하였다.

참고문헌
  • 『言論人 金三奎』(言論人金三奎刊行委員会,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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