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李善洪 |
---|---|
한자 | 李善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오사카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2월 2일 |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8월 11일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무안군 |
원어 항목명 | 李善洪 |
성별 | 남 |
1917년 일본 오사카부로 건너가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재일 조선인 사회 운동가.
이선홍은 1895년 2월 2일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태어나 1917년 10월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약종상이 되었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2녀를 두었다. 1921년 2월 형제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 7월 조선인 차별 해소,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한 조선인협회 결성을 제안하였다.
이선홍은 1922년 12월 도쿄 재일 조선인 유학생과 오사카의 일본인 노동 운동가가 결성하고자 하였던 오사카 조선노동동맹회 결성 때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들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후 전국수평사의 지도를 받아 간사이 조선인연맹을 결성하였다. 간사이 조선인연맹은 조선의 형평사와 수평사 교류의 중개 역할도 하였다. 이선홍은 1923년 5월 조선인협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25년 선우회를 발족시켜 총재가 되었다. 친목회라 속이고 군중을 모아 놓고 내선융화 강연을 하여 분노한 청중들에게 구타당하기도 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이 도쿄와 상하이에서 각각 폭탄을 던져 체포되었을 때는 반대로 더욱 충성하겠다는 근신의 뜻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일본 측에 위로장을 보내 공분을 사기도 하였다. 이선홍은 1927년 1월 조선인 차가 문제, 노동 재해 문제로 일본인을 협박하였다며 체포되었다. 1930년 내선융화 단체의 협의체인 중앙협의단을 조직하고 상임위원을 맡았다.
이선홍은 1931년 만주 사변이 일어난 이후 입후보하였고, 1932년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선거에 계속 출마하였다. 1936년과 1937년 제1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연속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세 번째 출마에서는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집행 유예 판결을 받기도 하였다. 1937년 도쿄에서 당선된 박춘금을 2,000표 웃도는 10,000표를 획득하였다. 선거 자금, 운동원, 호소 대상 등 첫 선거에서는 재일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선거 활동을 폈지만, 당선되지 못하였기에 일본인을 대상으로 선거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어 선거 공보 발행을 고집하고, 조선 축제를 열고, 조선 불교를 믿는 등 조선 문화를 고수하였다고 한다.
1941년 12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이선홍은 전오사카 조선인에게 전쟁에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오사카협화협력회의 대행위원장이 되었다. 대행위원장을 맡아 성전완수강연회라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1942년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네 번째로 출마하여 다시 낙선하였다. 이선홍은 1944년 9월 오사카 시내 단층 연립 주택에서 사망할 때까지 요시찰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