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원어 항목명 李起鴻
한자 李起鴻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2년 4월 13일
몰년 시기/일시 2012년 4월 29일
원어 항목명 李起鴻
성별
정의

1920년 일본 도쿄도에서 설립된 상애회의 오사카본부 회장을 맡은 친일 인물.

활동 사항

이기홍은 1922년 4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에서 인삼 거래 등으로 부를 축적한 거상이었다. 1921년 당시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으로서 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이기홍을 포함하여 2명뿐이었다. 이기홍은 1923년 5월 상애회 오사카본부가 결성되면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상애회는 1920년에 도쿄에서 조직된 노동 단체로 일본 각지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이기홍은 1927년 초 간부들이 대거 교체되어 일본인 중심으로 조직이 개편될 때까지 상애회 오사카본부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상애회 오사카본부 회장에 선출된 직후 오사카 당국이 지역의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1922년 조직한 내선협화회(內鮮協和會)의 평의원을 맡았다. 내선협화회는 오사카 부지사와 오사카 시장이 고문을 맡는 등 임원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평의원인 이기홍과 유석우만 조선인이었다.

상애회는 당시 회원 10만 명이 넘는 거대 조직이었는데 오사카본부는 1924년 오사카 각지에 지부를 두면서 3,500명[대부분 조선인 노동자]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상애회는 출범부터 “민족적 차별 관념 철폐와 일선융화[조선의 일본화]의 철저함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특히 조선 노동자를 위한 정신적 교화와 경제적 구제를 도모함을 중대한 사명으로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후 활동은 선언과는 정 반대로 흘러갔다. 특히 조선인 직업 소개 활동을 펼쳤는데 이 일은 상애회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상애회 회원들은 일본 사업가에게 적은 임금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소개시켜 주는 대가로 알선료를 받았고, 노동자에게도 임금의 일부를 받아 챙겼다. 특히 힘 없는 여공들의 경우 급료를 전부 횡령하는 사건이 일본 전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상애회는 각 사업장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역할도 맡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거나 조직이 만들어지면 여지없이 상애회가 개입해 조직을 파괴하고 사업자에게 소위 중재료 명목으로 돈을 챙겼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22년부터 1923년 5월까지 상애회의 중재 건수가 200건에 이르렀다. 일본인 사업가들 사이에서는 조선인 문제는 상애회에 의뢰하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민족 운동, 노동 운동 세력은 상애회를 어용 단체로 지목하였다. 1926년 4월 조선노동총동맹 측이 상애회를 이류(異流) 단체로 지목하고 오사카에서 대회를 개최하여 상애회 박멸 건을 상정하자,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도쿄 상애회의 설립자이기도 한 박춘금(朴春琴)과 총본부 회장 이기동(李起東) 등이 오사카에 와서 오사카본부 간부들과 숙의하였다. 상애회 회원들은 조선노동총동맹 간사이연합회[關西聯合會] 사무실을 습격하여 간부들에게 상해를 입혔고 총동맹 측에서도 상애회 사무실을 습격하여 노동조합원 3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기홍은 1926년 12월 상애회 오사카본부 회장으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순종 애도식을 주관하였다.

상애회 간부를 그만둔 이후에는 1932년 3월 결성된 오사카 조선약업조합[大阪朝鮮藥業組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오사카 조선약업조합에는 이기홍이 상애회 오사카본부 회장이었을 때 부회장을 지낸 이재학도 참여하였다. 이재학은 약업조합 기관지인 『매약월보(賣藥月報)』[1937년 창간] 발행인이었다.

참고문헌
  •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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