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大木金太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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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木金太郞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929년 2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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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94년 |
활동 시기/일시 | 2000년 |
몰년 시기/일시 | 2006년 10월 26일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
원어 항목명 | 大木金太郞 |
성별 | 남 |
1960~197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큰 인기를 얻은 프로 레슬러.
김일의 프로 레슬러 데뷔는 1959년이다. 한 발을 들고 하는 박치기를 주무기로 하였고, 박치기 기술은 김일의 상징이 되었다. 김일은 박치기 기술을 이용하여 외국인 레슬러들을 쓰러뜨리며, 일약 인기 레슬러가 된다. 1963년 세계레슬링협회[WWA] 세계태그챔피언,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헤비급챔피언, 1966년 도쿄 올아시아 태그챔피언, 1967년 제23대 WWA 세계헤비급챔피언,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 태그챔피언에 오르며 20차례 챔피언 방어전을 치렀다. 많은 활약에 힘입어 한국과 일본에서 후원회가 결성되었다. 1969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제안으로 ‘김일 후원회’가 서울에서 결성되었고, 1976년 오키 긴타로 후원회 ‘한국의 호랑이’가 결성되었다. 한편 1974년 NWF 세계 헤비급 선수권에서 안토니오 이노키[猪木]와 대전해서 패하였다. 현역 시절 라이벌이었던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가 병환으로 입원한 오키 긴타로를 문병한 일화가 유명하다.
1984년 한국에서 프로 레슬링이 인기를 끌면서, 오키 긴타로는 한국으로 건너가지만 1985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사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치기왕 김일은 2000년 3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선수 생활의 후유증으로 1987년부터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1994년 1월 한국으로 귀국하여 투병 생활을 하였다. 2006년 10월 26일 사망하였으며 제자로는 이왕표 선수가 있다.
김일의 저서로 2006년 일본 강담사에서 출간된 자서전 『오키 긴타로 전설의 박치기왕[自伝大木金太郎伝説のパッチギ王]』이 있다. 한국에서도 『굿바이 김일』로 동시 출간되었다.
김일의 묘소는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에 마련되어 있으며 김일기념관도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