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金熙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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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熙秀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9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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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88년 |
활동 시기/일시 | 1994년 |
몰년 시기/일시 | 2012년 1월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 진동면 |
원어 항목명 | 金熙秀 |
성격 | 기업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중앙대학교 이사장 |
1924년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성공한 재일 한인 사업가.
김희수는 1924년 경상남도 마산시 진동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권유로 1937년 1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초대받지 않은 번거로운 손님 같은 존재였다. 김희수는 자신의 능력에 철저하게 의지하며, 교육을 받고 자본을 모으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업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1945년 종전(終戰) 후 1949년 도쿄전기대학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였으며, 가네이[金井] 양복점을 열고 양복점 수입으로 학교를 다녔다. 1953년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어군(魚群)탐지기를 만드는 회사를 경영하던 형을 도왔지만 대기업의 시장 진출로 금세 실패하였다. 김희수는 1960년대 부동산을 모으기 시작하며 재산을 모았다. 부동산을 기반으로 김희수는 점차 부동산 재일 한인 기업가로 부상하였으며, 일본의 도심에 수십 채의 빌딩을 세우고 임대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시선이 좋지 않았으며, 자금 유통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김희수는 이런 문제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고 긍지와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을 믿어 주는 개인 및 단체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부동산을 관리하였다. 빌딩의 관리 서비스를 위해 정기 검사를 철저하게 하였으며, 여러 불편 사항이 발생하는 경우 사장이 직접 작업복을 입고 출근하는 등의 노력으로 신용을 쌓아 나갔다. 김희수는 일본에서 일하면서 한국인이라는 프라이드가 자신을 지탱시켜 주었으며, 한국인의 우수함을 강조하며 절대 위축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김희수는 2009년 6월 9일 수림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일하며 문화, 예술 분야의 육성에 헌신하였다. 수림문화재단은 인간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바탕으로 소외된 계층에 대한 문화 격차 해소, 전통 문화 예술의 육성, 인재 양성, 한일 문화 교류 등 국제 교류에 앞장서는 역할과 함께 시대적 변화와 환경에 맞추어 적극적인 내용을 추구해 나가고 있다. 또 1987년 사재를 털어 출연한 한국의 중앙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며 국내 교육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김희수는 2008년 중앙대학교 경영을 두산그룹에 넘기고, 수림재단 등 공익 활동에 힘썼다. 김희수는 2012년 1월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김희수는 1988년 체육훈장 청룡장, 1994년 국민 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다. 2001년 러시아 게르첸대학에서 명예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