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모

원어 항목명 鄭敬謨
한자 鄭敬謨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4년
수학 시기/일시 1937년~1942년
수학 시기/일시 1943년~1945년
수학 시기/일시 1946년~1947년
수학 시기/일시 1947년~1950년
활동 시기/일시 1950년~1953년
활동 시기/일시 1956년
활동 시기/일시 1969년
활동 시기/일시 1970년
원어 항목명 鄭敬謨
성격 통일운동가
성별
정의

1970년 일본으로 망명한 재일 코리안 평론가이자 번역가, 통일 운동가.

개설

정경모는 한국 전쟁 휴전 통역관을 맡았으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미군 사령부에서 해고되었다. 한국에서 임시 강사와 정부의 기술고문을 하였고 1970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김대중 사건과 관련한 대담으로 일본 언론계에서 주목을 받았고, 이후 한국의 민주화, 통일 운동과 관련된 저작과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정경모의 아버지는 기독교 장로 정인환이다. 정인환은 생업으로 독장사를 하였고, 영등포 일대에 보유하였던 토지가 수용되어 거금을 벌자 무주택 저소득층을 위한 200채의 주택을 건설하였다.

활동 사항

정경모는 1924년 경성에서 태어나 1942년 경기중학[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45년 게이오대학 의학부 예과를 수료하였다. 1950년 미국 에모리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전쟁 발발 이후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의 권고로 미 국무성 직원이 되어 판문점 휴전 회담의 통역으로 파견되었다. 1956년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미군으로부터 기피인물[Persona nongrata]로 지적받아 판문점 퇴거 명령을 받아 해직당하였다. 1960년대 상공부 기술고문으로 근무하고, 울산 석유화학단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70년 일본으로 망명 후 한국의 독재 정권을 고발하는 내용의 책을 펴냈다. 김대중 납치 사건 직전에 가진 대담이 『세카이』에 실리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1973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시보』에서 주필로 일하였다. 또한 영문으로 『코리아 뉴스레터』를 펴내 외신 기자와 외교관들에게 한국 정세를 알리기도 하였다.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시기에는 한일 지식인, 정치인들과 함께 김대중 사건 해결, 김지하 구원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1978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임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제명당하였다.

1979년 도쿄에서 씨알의 힘이라는 글방을 개설하고, 한국어와 역사 강좌를 시작하였다. 1981년 『씨알의 힘』이라는 한국 문제 전문 잡지도 발간하였다. 여운형, 김구, 장준하 세 사람의 가상 대담을 엮은 『찢겨진 산하』가 1980년대 중반 한국에서 해적판으로 출판되었다. 『씨알의 힘』은 1991년부터 『씨알[粒]』이라는 팸플릿 형식으로 변경되어 2004년까지 발간되었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통일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4·2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문익환 목사 사망 후인 1995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과 함께 다시 방북하였다. 2009년 『한겨레신문』에 「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라는 회고록 연재를 통해서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기술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정경모의 작품으로는 1972년 『어느 한국인의 마음 : 조선통일의 여명에[ある韓国人のこころ- 朝鮮統一の夜明けに]』, 1974년 『일본인과 한국[日本人と韓国]』, 1976년 『한국민중과 일본[韓国民衆と日本]』, 1980년 『기로에 선 한국 : 중간결산[박사살] 후의 미래[岐路に立つ韓国 : 中間決算(朴射殺)後の行くすえ]』, 1985년 『일본에 묻다[日本を問う]』, 1992년 『찢겨진 산하』[거름], 2010년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사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한겨레신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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