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쓰노미야 도쿠마

원어 항목명 宇都宮德馬
한자 宇都宮德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 9월 24일
수학 시기/일시 1923년
수학 시기/일시 1928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활동 시기/일시 1938년
활동 시기/일시 1952년
활동 시기/일시 1955년
활동 시기/일시 1976년
활동 시기/일시 1980년
몰년 시기/일시 2000년 7월 1일
출생지 일본 도쿄도
원어 항목명 宇都宮德馬
성별
정의

한일 관계 개선과 아시아 평화를 위해 활동한 일본의 정치가·실업가·비핵 운동가.

개설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1906년 출생하여 2000년 사망하였다. 조선군 사령군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재일 조선인 학살, 사회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의 살해사건을 보며 군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중퇴하였다.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재학 중이던 1929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지만 전향을 해서 석방되었다. 이후 만주 사변 관련 군수 산업에 투자해 거금을 벌었다. 1938년 미노파겐 제약을 설립해 기업가로 변모하였다.

가계

우쓰노미야 도쿠마의 아버지는 1918년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이다. 우쓰노미야 다로는 3·1 독립 만세 운동 이후 강압 수단을 사용해 조선인을 진압할 것을 명령해 제암리 학살 사건을 비롯한 여러 학살 사건의 명령자로 여겨지고 있다. 사후 85년이 지나 공개된 우쓰노미야 다로의 일기에는 당시 살육 사건의 경위가 드러나 있다.

활동 사항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1952년 자유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되어 정치계로 나섰다. 1955년 보수연합에 의해 자유민주당[자민당]으로 당적이 바뀌었지만 당내 좌파로서 아시아 지역의 평화 공존 외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소련, 중공, 북한 등과 국교 회복을 주장하였고, 아버지의 경력과 반대편에 서서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5년 한일 조약 비준에 반대하였고,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때도 일본 정치인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건 해결을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자민당 내에서 우쓰노미야 도쿠마의 활동은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1976년 자민당을 탈당한 뒤 일시적으로 의원직을 그만두었다. 1980년 무소속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에는 군축 활동에 전념하였다. 군축 전문 연구실을 만들고 월간지를 창간해 평화 공존을 위한 핵무기 폐기와 군축을 주장하였다. 1980년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하고, 김대중이 집권한다면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연방제가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노태우 대통령 시기에는 재일 코리안 정치범 석방을 위한 요망서에도 서명하는 등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상황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한 자신의 활동에 대해 “조선 민중에게 고통을 주었던 아버지를 보상하려는 잠재 의식이 내게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저술 및 작품

우쓰노미야 도쿠마의 저서로는 『관료사회주의비판 자유주의 정치의 기초[官僚社会主義批判 自由主義政治の基礎,]』[山雅房, 1950], 『평화공존과 일본외교[平和共存と日本外交]』[弘文堂, 1960], 『김일성·우쓰노미야 도쿠마 회담의 기록[金日成·宇都宮徳馬会談の記録]』[1974] 등이 있다.

참고문헌
  • 다테노 아키라, 『그때 그 일본인들: 한국 현대사에 그들은 무엇이었나』(오정환·이정환 옮김, 한길사, 2006)
  • 『宇都宮徳馬追悼集』(宇都宮徳馬追悼集刊行委員会, 2001)
  • 『アルジェリアを知るための62章』(明石書店,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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