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치 신

원어 항목명 靑地晨
한자 靑地晨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9년
활동 시기/일시 1938년
활동 시기/일시 1944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활동 시기/일시 1974년~1975년
활동 시기/일시 1974년
몰년 시기/일시 1984년 9월 15일
출생지 일본 도야마현
원어 항목명 靑地晨
성격 저널리스트|인권운동가
성별
정의

1940년대부터 활발하게 활동한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 한일 연대 운동가.

가계

아오치 신의 아버지는 사가번 하급 무사로 고토 신페이가 일으킨 사가의 난을 비롯해 의화단의 난,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참전한 후 보병 제22연대장을 역임한 군인 출신이다.

활동 사항

아오치 신의 본명은 아오키 시게루이다. 1909년 일본 도야마현에서 태어나 사가현에서 성장하였다. 1938년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에 입사하였으나 1942년 편집차장을 끝으로 퇴직하였다. 1944년 잡지 기사를 문제삼아 60여 명의 언론인을 체포한 요코하마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 시기 투옥 경험은 전쟁 이후에 권력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옥중에서 고문에 굴하지 않는 조선인 청년으로부터 받았던 강한 인상은 훗날 한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아오치 신은 일본 패전 직후인 1945년 세계평론사[世界評論社]를 설립하고 편집장을 맡았다. 1950년대 이후에는 독립 저널리스트 및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죄가 없는데 혐의를 뒤집어쓴 사건들을 주로 취재하고 『원죄의 공포[冤罪の恐怖]』와 『마의 시간 : 6개의 원죄 사건[魔の時間 : 六つの冤罪事件]』를 펴내 무고 사건을 고발하였다. 아오치 신이 언급한 사건 중에는 재심을 청구하거나 무죄가 확정된 경우도 있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고, 일본의 지식인들과 함께 한국 민주화 지지를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74년 와다 하루키, 시미즈 도모히사 등과 함께 일본의 대한정책을 바로잡고,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 연대하는 일본연락회의[일한연대연락회의, 한일연대연락회의]를 결성하고 대표직을 맡았다. 한일연대연락회의는 김지하 구명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9월 19일 사회당과 공산당의 책임자들과 협의해 메이지공원에서 3만 명이 모인 국민 대집회를 개최하였다. 아오치 신은 집회 행렬의 선두에 나섰다. 김대중 구명 운동에 나서면서 수입의 전부였던 저술 활동을 중단하고, 선불로 받은 인세를 돌려주기도 하였다. 한일연대연락회의는 1978년 해산되었다. 한편 언론인으로서의 활동도 왕성하게 전개하였다. 1974년 개교한 일본 저널리스트 전문학교의 초대회장이 되어 기자와 르포라이터 양성 교육에 힘썼다. 일본으로 망명한 정경모의 집필 활동을 격려하고, 일본 사회에 아오치 신의 글을 알리고자 하였다.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발생하자 1970년대 활동하였던 인사들과 함께 다시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다.

저술 및 작품

아오치 신의 작품으로는 1969년 『원죄의 공포』, 1976년 『마의 시간 : 6개의 원죄 사건』, 『격동하는 아시아와 조선 : 일한 민중의 연대를 바라며[激動するアジアと朝鮮 : 日韓民衆の連帯を求めて]』, 1977년 『일한 연대의 사상과 행동[日韓連帯の思想と行動]』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정경모,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사, 2010)
  • 와다 하루키, 「와다 하루키 회고록」(『한겨레 신문』, 2006~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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