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노 요시토모

원어 항목명 朝野溫知
한자 朝野溫知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활동 시기/일시 1935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활동 시기/일시 1950년~1951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몰년 시기/일시 1982년
원어 항목명 朝野溫知
성별
정의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부락 해방 운동을 한 재일 한인 출신의 사회운동가.

활동 사항

아사노 요시토모는 1906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한국명은 이수룡(李壽龍)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대에서 몰락하여 서울로 상경한 뒤 상점 점원으로 일하였다. 1924년 아사노 요시토모는 친구인 이북만과 일본으로 도항하였다. 경성일보 도쿄지국에서 근무하다 내선 융화를 주장하는 지국장과 의견 대립을 일으키고 사직하였다. 이후 교토의 대형 사찰 히가시혼간지 사회과장 다케우치 료온을 만나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시가현에서 활동하며 아나키즘과 피차별 부락민의 지위 향상을 위한 수평사 운동을 함께 펼쳤다. 피차별 부락민의 지위 향상을 위해 투쟁한 수평사 운동과 부락해방동맹 운동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이다.

이 시기에 마쓰모토 지이치로 등과 함께 수평 사상을 담은 월간 신문 『자유평론』을 발행하였다. 1935년 무정부 공산당 사건과 관련해서 검거되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판결을 받았다. 복역 중 신란(新鸞) 사상의 영향을 받아 전향을 택하였고, 히가시혼간지의 진종 오타니파의 승려가 되었다.

전후에는 히가시혼간지 사회부의 명을 받고 시가현의 기노모토정 피차별 부락으로 파견되어 보육원을 운영하였다. 1948년 부락해방동맹 시가현 연합회 서기장이 되었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였지만 1950년 「외국인등록령」 위반으로 검거되고, 1951년 퇴거 명령을 받아 나가사키현 오무라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부락해방동맹과 히가시혼간지, 사회당 등이 항의 운동을 전개하였고, 결국 송환은 피하게 되었다. 1960년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다. 차별 철폐 운동의 중심지로 삼았던 기노모토정에서 오랫동안 의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또한 부락해방동맹 시가현 연합회 부위원장과 중앙위원을 맡으며 부락 해방 운동에 전념하였다. 1982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아사노 요시토모의 저서로는 1988년 『종교에 차별이 없는 세계를 위하여-아사노 요시토모 유고집[宗教に差別のない世界を求めて―朝野温知遺稿集]』이 있다.

참고문헌
  • 水野直樹, 「部落解放運動に献身した朝鮮人仏教者: 朝野温知[李壽龍]の歩み 」(『部落解放』,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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